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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Mar 22. 2016

할머니의 비밀 정원

 할머니의 평범한 열정이 일상에 무뎌가던 나에게 준  선물

 동백꽃 군락지를 찾아 남쪽 제주 바다로 가면서 간절히 바랐다. 아직 새빨간 동백꽃이 주렁주렁, 소담히, 수북히 피어 있기를. 새빨간 동백꽃처럼 내 마음, 삶에도 새빨간 열정이 피어나기를. 그런데 위미항가까이로 갈수록  간간히 길거리에 뿌려졌던 빨간 꽃잎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렇게 위미동백나무 군락지에 도착했을 때는 커다란 나무가 숨은 보물찾기 하듯 빨간 꽃잎을 수줍게 숨겨 놓고 있어 꽃들의 군무는 볼 수 없었다. 조금 실망스러웠다. 짙푸른 잎들이 따뜻한 봄햇살로 반질반질 빛났고 잎도 이쁘지만, 짧은 한철 환상적인 꽃길을 내심 기대했었단 말이다.



 아쉬운 맘을 달래며 길 가에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들고 걸으며 한 할머니를 생각했다.
 현할머니의 집념 어린 작은 꿈의 결실을.
 황무지 땅에 부는 바닷바람을 막으려 한라산 동백꽃 씨앗을 부지런히 뿌려 일군 동백꽃 군락을.
그렇게 황홀한 꽃의 절정에서 마침내 이룬 할머니의 꿈에 젖어보고 싶었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일군 꽃들의 향연 한가운데 서서 할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 꽃나무를 가꾸었을지 상상해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의 마지막 자존심을 짓밟지 않으려 조심스레 걸어 나오다 한 그루 벚꽃나무를 발견했다. 길 가에 즐비하게 줄 선 벚꽃나무 중 유일하게 만개한 이 나무는 암묵적으로 정해진 개화 시기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충분한 햇빛의 양이라 판단했는지 무척 다부지게 꽃들을 벌여 놓고 있었다. 그 나무의 눈치 보지 않는 당당함이 무척 마음에 들어 한참 꽃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나 대신 아들을 안고 있었던 동생이 고함을 질렀다. "앗!"


  놀란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낯선 남자가 아들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고 꽃구경하다 나타난 검은 손에 동생은 아들을 감싸며 몸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남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보다 눈가의 긴 눈웃음 꼬리가 먼저 시선에 와 닿았다.

 "괜찮아."

 내 말에 두 눈을 꼭 감고 웅크리고 있던 동생이 조심스레 눈을 떴고 그녀도 그 남자의 눈을 보더니 긴장을 풀고 아들을 슬며시 우리 앞에 내놓았다. 남자는 만개한 잇몸으로 환하게 웃으며 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멀뚱멀뚱 그를 보던 아들이 싱긋 웃자 남자는 더 신이나 우리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안녕, 하며 손을 씩씩하게 흔들며 인사했다. 길을 건너 뒤돌아보자 그는 골목길을 가다가도 연신 뒤돌아보며 계속 손을 흔들었다. 축 늘어진 한 쪽 팔과 한 쪽 다리를 열심히 끌면서 기분 좋은 듯 힘차게. 그 모습이 짠해 우리도 더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가 돌아가는 뒷 모습을 길가의 벚꽃 나무가 아름답게 보듬어주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우연히 좁은 골목에 빨간 꽃길이 얼핏 보여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런데 막상 내리고 보니 붉은 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에 다급하게 차를 세우자고 했던 내가 머쓱해져 '아, 아쉽네.'라고 말했을 때였다.


 돌담집에서 할머니 한 분이 막 나오시더니 여긴 뭐하러 왔냐고 물으셨다.

 "꽃 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다 졌네요."

 할머니는 제주도 방언으로 여기 꽃이 얼마나 예뻤는지 한참 이야기하셨다. 빨간 동백꽃도, 노란 귤도 소담소담, 듬뿍듬뿍 열렸노라고. 그러면서 자신의 집 안마당에 들어가보라고 하시더니 시크하게 갈 길을 가셨다.



 할머니의 정원에 초대를 받고 들어섰을 때 우리는 와,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멋있어."


 빨간 꽃들도, 노란 귤나무도 절정을 지나왔지만 눈부신 햇살이 내려앉은 마당에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할 것 없을 마당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엄청나게 좋은 마당이었다. 마치 나에게 '네가 찾던 정성어린 정원이 이런 거였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엄마와 동생, 나와 아들이 그 정원에서 한동안 거닐며 오후의 기분 좋은 햇살을 즐기다 나오는 그 때, 우리는 살짝 들떠있었다.  큰 기대없이 들어간 곳이 생각보다 멋졌기 때문이었을까? 그 보다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평범한 열정을 나도 다시금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가득차 올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굳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름답게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 아닐까? 삶은 소소하게 아름답다. 할머니의 정원을 나오며, 그리고 위미 동백나무 군락지를 일군 현 할머니를 생각하며 에머슨의 시를 중얼거렸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지성인들로부터는 존경심을, 아이들로부터는 애정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에 감사하고 나쁜 친구들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고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 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한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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