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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Mar 27. 2016

블레드 호수 거닐기

슬로베니아 블레드, 동화같은 풍경과 우리.

아기가 잠든 사이, 창 밖을 보니 회색의 하늘. 서늘한 공기. 이런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이 곳이 떠오른다.


나의 신혼 여행지였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섬, 블레드 호수 .


오늘 같이 잔뜩 흐렸던-




아침 일찍 일어나 자그레브 시내를 한 바퀴 활보한 후, 기차역 락커에서 짐을 꺼내고 슬로베니아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묻고 물어, 정시에 기차를 탔건만 중간에 표 검사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기차를 잘못 탔다고 알려줬다. 

"당황하지마, 괜찮아.

다음 열차인데 내가 내릴 역을 알려주면 그 때 바꿔타면 돼."

 무뚝뚝였던 거구의 그는 우리보다 더 당황한듯 표 검사하러 갔다가 자꾸만 다시 와 그 말을 반복했다. 그런 그 덕분에 삼십 여분을 마음 놓고 창 밖을 볼 여유가 생겼다.


친절한 사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에게 받는 도움은 갑절 고맙다. 유리창에 비친 승객들을 보며 사람이 아름답단 생각을 새긴다.





 그가 미리 말해 놓았던지,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는 아주 작은 역의 승무원이 우리가 내린 플랫폼으로 왔다. 그리고 직접 다음 기차를 탈 플랫폼으로 안내 해주고는 어색하게 옆을 지켜 주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제 알게 된 나라라는 말을 재치있게 하며 웃는데 빗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다시 올라탄 기차 안에서 여권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얼굴이 여권 사진과 다르다며 검사원이 한참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는 정말  모르겠다며  동료 셋을 더 불렀다. 내가 볼 땐 똑같은데 사진은 삭발머리, 지금은 그 때보다 훨씬 길어진 머리 스타일 때문에 달라 보였나보다. 침묵 속 서로 들여다보는 15분의 시간.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여행와서 대놓고 얼굴을 뜯어다 보는 건 처음. 기차가 연착되자 그들은 확신이 없지만 그냥 패스라고 말하며 지나쳐 갔다.

 그 상황이 웃겨 키득거리고 있었는데 한 켠에 타고 있던 한국인이 다가왔다.

 "오늘 포스토니아 동굴 같이 가실래요?"

오전 기차가 없어 오후에 이동하느라 포기했던 곳인데 가자고 하니 욕심이 생겼다. 도착해서 포스토니아행 티켓을 끊는데 그 곳은 이미 문 닫았을 거니 가지 말라고 역무원이 조언했다. 망설이고 있는데 안내 책자에 6시까지 입장가능 이라 적혀 있기에 우리는 가기로. 비오는 류블랴나는 무척 추웠고 우리는 배가 고팠다. 입장 마감 시간 전에 가려 포스토니아에 내리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제발!

 영화처럼, 기적처럼 당연히 볼 수 있을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더 힘껏 비를 맞으며 내달렸다.


그러나  결국 문닫힌 입구.

허탈하게 아쉬움을 안고 돌아오는데 무지막지한 피곤과 허기가 몰려왔다. 락커에서 짐을 찾으니 9시 반. 우산 쓸 기력도 없이 어차피 옷도 다 젖었고... 해서 터덜터덜 겨우 겨우 숙소로 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날밤 너무 피곤했다. 며칠째 제대로 못 잤기에 자려고 애썼는데 기분도 좋지 않고 잠도 안왔다. 우리 왜 그렇게 무모했지?


무모하게 아슬아슬하게 꼭 거기를 갔었던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가지 않았다면 맛있는 음식을 사먹고  컨디션이 좋았다면 류블랴나 시가지를 거닐었겠지.  갔지만 못 봤기에 에피소드가 생겼고 포스토니아의 흐린 하늘과 낡고 성그런 역을 볼 수 있었겠지.

빗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선택'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다 얼핏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

선택의 연속. 후회를 가장 적게 남기는 선택. 그리고 선택했으면 긍정적으로 남겨야하는 의미들과 성찰. 언제나 그러는게 나 자신을 위해 옳았다.




나는 누워 밝아 오는 류블라냐아침

살피고 살폈다. 멀리 떠나왔는데 아침의 공기는 익숙했다.




아침 일찍 찾은 버스역에서 블레드 호수로 가는 티켓팅을 한 후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탔다.


( 류블랴나  - 블레드 : 약 6.5유로,  1시간 20분 소요,  수시로 버스 있음)



우리는 항상 아주 사소한 이유로 다툰다. 내 말을 잘 받아주지 않았던게 서운해 툴툴대며 앞서 가다 호수를 보는 순간 서로의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사소함을 잊고 담대해질 수밖에 없는 상쾌함을 사랑한다.



너무 싸늘한 날씨에 콧등이 시렸지만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아 계속 호숫가를 걸었다. 흐린 하늘 아래 블레드 호수는 참 조용하고 운치있었다. 어두운 느낌의 하늘도, 서늘한 공기도 모두 좋았던 날.

 

호수 서쪽으로 있는 바위산 위 블레드 성



아 - 행 복 하 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마음도 삶도 행복해진다. 걷다 사진기도 핸드폰도 책도 모두 가방에 넣고 지금에 집중했다. 진짜 오랜만에 어떤 생각도  하려 하지 않고 눈 앞의 것에 마음을 열었다. 오감이 하나하나 열리는 기분. 감각 세포가 일일이 살아났다.


그리고 결혼 준비의 피로와 특별 휴가를 위한 업무처리, 긴 비행, 부족한 수면, 여행에 대한 기대와 초조함으로 다소 피곤했지만 그냥 이 날이 너무 좋았다. 좋은 것엔 특별한 이유가 필요없다.

그래서 오후 여정을 모두 취소하고 그냥 호수 보고 멍 때리기.

그러다 허기진 배를 채우러 블레드 크림 케이크 먹으러 카페에 들어갔다.


파크 크림슈니테 (크림 케이크)

이른 아침이라 카페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커피와 케이크는 이 여행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한갓지게 앉아 지금을 즐기고 있을  때, 작은 손님이 우리를 방문했다. 우리 케이크를 탐내던 손님은 부스러기에 만족하고 이내 친구를 따라 노래부르며 하늘로 날이올랐다.



그렇게 한 참을 앉아 있다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많아지고 이야기 소리로 소란스러워졌을 무렵 블레드 섬으로 가기 위해 자리를 일어섰다.


블레드 섬, 슬로베니아 유일의 자연섬

섬으로 가는 길은 전통 나룻배인 플레타나를 타는 것. 사람이 별로 없어 한참을 기다려 다섯 사람이 각자  약 6만원 정도를 내고 탔다. (타는 인원 수가 많을 수록 적게 낸다.)


플레타나. 나룻배라는 의미.

플레타나를 타고 가는데 호수에 비친 모습에 매료돼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가만
일 분 일 초를 담았다.


알프스 빙하가 녹은 맑은 물에 비친, 블러드 성이

꼭 거울 속에 갇힌 마법의 성 같았다.


그렇게 흠뻑 호수에, 알프스 산자락에, 이트 하는 연인들의 모습 빠져 있는 사이 우리의 배는 섬에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왜 이 곳을 줄리안 알프스의 진주라고 하는지 ...
알 것 같았다.
 

우리 말고도 같이 탄 사람들은 다 미국에서 왔는데
각자 자기 소개를 하고 뱃사공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는 가업으로만 전통 나룻배인 플레타나를 몰 수 있고, 비성수기에는 국가대표 농구선수를 하며 플레타나를 젓고 받는 임금은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보다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지금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 바이러스가 스물스물 배 안에 퍼졌다.
그러면서 그 곳에 있는 별장이 누구의 것인지
설명해줬는데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별장만  알아들었다.



사실 이 섬에 가면 하고 싶은 것은 딱 하나. 

계단을 오르는 것.
99개의 천국의 계단.


이 계단을 신랑이 신부  등에 업오르는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으백년해로 한다는 전설이 있어 우리도 오르고 싶었던 것.
단, 내가 못업으니 신랑이 업고서.


내리자마자 야심차게 날 업고 계단을 단숨에 올랐던 그. 날 땅에 내려놓자 사람들이 박수쳐주며
훌륭한 남자라고, 축복해줬다. 그러면서 이젠 신부차례라고 다시 내려가라고 장난을 쳤다.


그런데  웃긴우리가 오른 계단은 99계단이 아닌
그냥  뒷쪽 계단이었다.

다시 시작해? 라고 그가 물었지만 사실, 그게 뭐그리 중요하겠나.


그가 날 업고 계단을 오를 때,

침묵 속에

헐떡이던 그의 숨, 심장의 요동.

진득히 베어나오던 땀.

놀랍게도 침묵의 시간 속에 그의 사랑을 원초적으로 느꼈던 진귀한 시간이었는데.

 난 그거면 됐다.
그냥 그가 날 땅에 내려놓았을 때, 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마구 마구 샘솟았으니까.

침묵은 때로 그 어떤 언어보다 진실한 것을 말해준다.

 

계단을 오르면 성모 승천성당이 보인다.

성모승천성당


이곳의 종을 울리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많은 연인들이 종을 울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이름하여

'소망의 종'


산적에게 남편을 잃은 아내의 가슴 아픈 전설이 깃든 이 종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수 많은 맹세들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겠지.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많이 노력하겠지.


영윈한 사랑이란 말에 솔깃했으나, 우린 사람들로 북적이고 쉴새없이 울리는 종소리가  그닥 내키지않아 계단에 앉아, 한가로이 노닥거렸다.

사랑의 맹세로 끊임 없이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맹세를 세어보았다.



성당 맞은 편, 작은 기념품 점


기념으로 사고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으나 아직 일정이 많은 배낭 여행이라 마음에만 담았다.



꼭 소유하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의 경이로움을 마음껏 즐기고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며 그냥 가는 것도 나는 좋아한다.




호숫가에 비친 블레드 성당에 작별하고   블레드 섬에서 돌아와 곧바로 간 곳은 블레드 성. 절벽 위의 성이 유일하게 이 고즈넉한 호수를 압도하고 있다. 생각보다 가는 길은 쉬웠 슬슬 그렇게 걷기 좋았다.성으로 가는 길에 작은 성당에도 잠시 들어가보기도 하며 그렇게 슬렁슬렁.



  가파르게 보이던 성이 의외로 쉽게 올라 갈 수 있다니. 작은 것에 놀란다.



독일 황제 하인리히 2세가 주교에서 하사한 성인 블레드 성으로 입성. 투박하게 생긴 듯하지만 반들반들한 돌 하나, 하나가 이 곳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오픈 시간 : 8시 - 21시 ,요금 : 성인 1인 9유로



 역시나 높은 곳에 오르면 한 눈에 모든 걸 보게 된다. 그리고 감탄하게 된다.

여기, 진짜 멋있구나.아름다운 곳이구나.



한 참을 넋나간 듯 바라보게 되는 풍경. 그리고 그렇게 마음 속에 꼭꼭 저장하고 싶은 풍경.

음식을 주문하테라스에 앉았다. 점심이지만 안개가 걷히지 않은 블레드 섬을 한참 보다 추워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9월의 슬로베니아는 무척 추웠다.



웨이터의 추천 메뉴를 주문했는데 드라이 와인과 다소 딱딱한 빵이 아, 외국에 왔구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따뜻한 스프가 몸을 따뜻하게 해줬다.코스 요리를 먹었는데, 스테이크는 투박하고 디저트도 평범했으나 이 모든게 고성에 어울리는 것 같아 만족했다. 오히려 너무 화려하고 맛있었으면 너무 관광지 느낌이 났을 것 같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이기에 내부까지 들어가봤다.



어두운 실내를 살피다 바깥을 보니 살짝 현기증이 났었다. 낡고 오래된 냄새가 주는 경건함이 좋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인쇄 공방이 있다. 구텐베르트 인쇄방식 금속활자를 사용하는 곳.

이 곳에서 작은 기념품도 팔고 금속활자로 방문증도 만들어 준다.


마음에 드는 글귀가 있어서 찰칵! 그와 내가 행복을 나눌 수 있어 더 좋다.



다시 총총총 산책하듯 걸어 나와서 이제는 블레드  호수와 이별할 시간.

돌이켜 보면 우리의 여행 중, 가장 추웠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아름다웠곳.크로아티아보다 더 더 더...우리의 마음 속에 와 닿았던 동화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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