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보내는 하루
끔찍하게 더운 날의 연속이다. 해마다 이렇게 더웠던 적은 없었는데 올해는 타죽을듯 덥다.
고통스러운 열대야를 보내며 나는 갈고 간 나무작대기처럼 마음이 뾰족해졌다.
이유식을 만들며 뜨겁게 달라붙는 아이의 머리를 밀었다.
"잠깐만, 잠깐만. 떨어져 있어줘. 엄마 너무 덥고 힘들어.제발,"
남편은 북유럽형 가정적 남자인데 결코 저녁이 있는 삶과 육아대디를 허락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어 그도 힘듦을 알기에 나의 투정은 항상 공허했다. 사랑스런 아이에게 매끼 다른 반찬을 해주고 책을 읽어주고 시원한 곳을 찾아가 놀아주고, 공원에서 물놀이도 꼬박꼬박 시켜주고. 그러다보니 아이는 나날이 포동포동 인물이 나는데 반대로 어떻게해도 안 예쁘다 여겨졌다. 뽀족한 마음에 내가, 육아로 지치고, 살찌고 체력이 저질인 나 자신이 미워지고 실망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더위가 절정이고 체력이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나는 독박육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정행을 선택했다. 엄마에게 하루에 세 시간만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루 세 시간. 매일 밤 무엇을 할까 생각 하느라 잠이 안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목적지 잃은 방랑자처럼 주어진 세 시간의 여유를 어떻게 보낼지 설레는 가슴으로 고민하고 갈등했다.
첫 날.
우선 아이었을 때 살았던 곳에 가보기로 했다. 부모님이 결혼하고 분가하며 처음 분양받아 입주 했던 고향의 1호 아파트.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니고,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에 입학을 했었던 아주 오래된 아파트. 시간에 비례하게 켜켜이 쌓인 추억들로 꿈에서도 친구들과 뛰어놀던 보물같은 곳. 고향을 떠나 있으며 늘 궁금했지만 떠난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
그 곳으로의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아파트 입구의 녹슨 철조망, 여러 번 덧칠 했지만 한 번도 바뀐적 없는 아파트 표지판을 보자 가슴이 설렜다. 오랜 세월 변함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변함없길 바랐던 내 유년의 한 조각이 거의 변함없이 남아 있을 때, 그 낡고 빛바랜 조각에서도 경이로움이 느껴져 가슴이 찡 울렸다.
입구를 지나 놀이터로 향했다. 등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공기 뭉텅이가 훅, 코로 들어왔다.
텅 빈 놀이터에 그네를 독점 하던 효순이, 흙으로 소꿉장난하던 밝은 미소의 미현이, 비밀을 털어놓으며 울었던 정주, 늘 진정한 마음으로 나를 보며 웃어줬던 정렬이, 말이 없어 어려웠던 지선이, 셈 많아서 내 것을 뺏고 싶으면 엄마 손을 끌고 당당한 얼굴로 왔던 지순이, 순하게 눈 웃음 지어 친해지고 싶었던 지연이, 장난꾸러기라 등장하면 피하기 바빴던 건희와 석이, 의젓했던 용태. 거짓말쟁이인 줄 뻔히 알면서 늘 그럴듯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게 했던 문정이.
오랜 시간 한 번도 이름을 부른 적도, 떠올린 적도 없었던 친구들이 그 때의 얼굴과 옷차림 그대로 두둥실 떠올랐다.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모험을 하듯 아파트를 시끄럽게 쏘다녔던 우리들은 이제 서로의 소식도 모른채, 궁금해하지도 않으며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내일 또 만나, 라고 굳은 약속하듯 저녁인사 하고 헤어졌던 그 친구들은 뜨거운 땡볕 속에 하나 둘 사라졌다.
마지막에 엄마의 꾸지람에 불만을 품고 가장 아끼던 밍키 가방에 사탕과 비상금, 아끼는 장난감 가득 넣고 가출을 감행했다가 아무도 찾지 않아 서러웠던 꼬마 '나' 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의 나는 어둠보다, 마지막까지 놀이터에 혼자로 남아 있던 외로움이 더 무섭고 서러웠었다. 그리고 아무도 내가 가출했는지 몰랐던 집으로 돌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전 우리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이상 어둠도, 외로움도, 외톨이가 될까 조마조마했던 두러움도 무섭지 않은 '나'의 발걸음이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을 통통 울렸다. 이제 나의 인생에서 내 자리의 부재를 타인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으로 존재감을 확인하는 나이를 벗어난 것이다.
그 시절, 정많은 이웃들이 있어 나는 무사히 자라지 않았나 싶다.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님은 늘 피곤했었다. 나도 늘 피곤했었다. 곧잘 집열쇠를 잃어버렸으며 조잡한 유혹에 넘어가 문방구 앞 뽑기 기계에 꼬박꼬박 용돈을 저당잡혔었다. 운이 없어 열쇠도 잃어버리고 용돈도 털린 날이면 죄 없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대문에 가방을 걸어놓고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었다. 시계도 없이 바닥에서 뒹굴거리며 동생들이 엄마 언제 오냐고 물으면 이제 한 시간 남았다고 대답했고, 한 시간이 왜 이렇게 기냐고 물으면 원래 기다림은 그런 거라고 어른 흉내를 내며 지루해하곤 했었다. 그러다 이웃 아줌마들이 우리를 보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간식도 챙겨주고 숙제도 도와주며 엄마의 퇴근길을 같이 기다려 주었다. 조금은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그래도 좋았던 그 시절.
이 아파트가 좋았던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아파트를 둘러싼 초록이었다. 잔디밭을 헤짚다 벌에 쏘이면 누군가는 침을 발라주었고 누군가는 집에서 된장을 떠와서 발라주며 친구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맘 조리며 곁을 지켰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고 너도 나도 자신의 '밍기뉴'나무를 점 찍었으며 '비밀의 정원'을 읽고 아지트를 만들어 자신들의 보물을 숨기기도 했었다. '빨강머리 앤'을 읽고는 절친 '다이애나'를 누구로 할까 가늠하며 우리들만의 아지트를 찾아 나무 사이를 헤맸었다. 그 많은 나무들 사이 사이, 짙푸른 풀숲에 연약한 살갗이 베이도록 우리는 매일을 모험가처럼 헤매이며 하루하루를 보냈었는데.
나의 '밍기뉴' 나무는 베어지고 그 곳엔 주차장이 생겼다. 길가에 듬성듬성 낯익은 나무들은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듯 뙤약볕을 견디며 다정하게 서 있었다.
어렸을 때는 엄청 넓어 두 세명씩 앉아, 아직 오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던 바위는 앉을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비좁고 작았다. 집으로 오르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딛었던 계단은 낮디 낮아 세 칸을 한 번에 오를 나즈막한 높이가 되어 있었다. 화단 어딘가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조무래기들은 어딘지 꼭꼭 숨어 적막감만 나도는 예전에, 예전에 우리 가족이 살았던 어여쁜 집.
조금 더 걸어 아파트의 두 번째 놀이터에 당도했다. 비석치기와 땅 따먹기 놀이로 반들반들했던 아파트 블럭은 세월의 무게를 견딘 흔적으로 닳고 깨져 있었다. 운동화로 쓰윽쓱윽 모래를 문지르며 걸었다. 바람돌이 모래요정, 가사도 잊혀진 만화 주제곡을 흥얼거리며.
놀이기구를 서로 먼저 타려고 기를 쓰고 달렸던 두 번째 놀이터엔 햇빛만 다투듯 내리쬐 옹알대고 놀이기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여기 이곳에서...
그네를 타며 아직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은 무엇이든 되고 싶어 거짓말로 스스로의 대단함을 증명하려 했었다. 조무래기들의 거짓말은 허황대고 근거없이 둥둥 떠다니는 풍선 같았지만 그 풍선같은 거짓말이 없었더라면 어른이 되지 못했을 것 같다. 작은 자부심이 뭉쳐져 만들어진 말들이 나를 키웠을 것이다.
어른이 될거야, 멋진 어른이. 말에 힘이 실리고, 누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싸우지 않는 행복한 가정을 가질거야. 일등은 못했지만 괜찮아, 난 멋진 어른이 될거니까. 외롭고 친구가 별로 없지만 어딘가엔 더 멋진 친구가 있을거야.
허황된 거짓말 풍선은 어느 순간 하늘로 날아가버렸는지는 나도 모른다. 더이상 부질없는 거짓말은 위로가 되지 못하며 스스로도 허풍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그 동네 친구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어른이 되었다. 그냥 지금을 충실히 행복하게 살고 싶은 어른이 되었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장래희망이 진짜 내 직업이 된 어른이 되었다. 돌고 돌아 소박하고 소소한 일상을 사랑하는 어른이 되었다. 지치고 힘든 날, 두 눈 질끈 감고 짐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가는 어른이 되었다. 힘 잔뜩 들어간 어른 대신 올바름을 생각하려 애쓰는, 그러나 곧잘 모순투성이인 어른이 되었다.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남들의 말로 나를 규정짓던 나약했던 어린 나는 언제나 나보다 더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았었다. 친구든, 연인이든, 동료이든.
외롭기 싫었고 혼자 학교 가기 싫었던 어린 나는 인생은 둘이어도, 열이어도, 그 이상이 몰려 어울려 다녀도.. 스스로 자신과 잘 어울리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 옆에 있어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믿는 마음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스스로를 지키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수치심도, 열등감도 피할 수 없었지만 이제와 뒤돌아보니 그것들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죽고 싶을 만큼 마음이 힘들었던 날들도 시간은 둥글게둥글게 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견디고 살아지고, 살아가면서 어른이 되었다.
내가 살던, 그 집 문앞에 서서 가만히 벽을 쓸어보았다. 손 때 아래, 그 아래, 또 그 아래에 조그만 나의 손자국이 남아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나는 돌아가...
사랑으로 아이를 안아주는 엄마가 될 것이다. 있는 힘껏 아이를 이해하려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자그마한 등을 쓸어줄 것이다. 아이에게 그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고 아이의 속도를 존중하려 노력할 것이다. 결코 강하지 못했던 어린 아이가 작은 사랑과 칭찬으로 어른이 되었듯 아이를 길러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