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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Mar 11. 2016

때로는 혼자 걸어야한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도.

 매일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서 우린 조금 많이 지쳐있었다. 도대체 무얼 얼마나 많이 더 보겠다고 점 찍듯 도시를 이동했는지 후회가 됐지만 여전히  그 전으로 돌아간다해도 점 찍듯 유명한 것들을 눈도장 찍으며 여기로 왔을 것이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열시간 넘게 걸려, 독일에서 한 번 환승하고 이곳으로 왔으니.


 안개가 짙은 탓인지, 습도가 높았던 탓인지 아니면 그냥 피곤해서  컨디션이 나빴기 때문인지 그가 하는 말들이 하나도, 모조리 마음에 들지 않아 삐딱하게 지나갔다. 결국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먼저 걸어갔다. 화를 풀어주지 않고 게다가 나보다 먼저 걸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날 더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걸음을 더 빨리해 그의 어깨를 일부러 세게 밀치며 좁은 나무다리를 걸었다. 내가 단단히 화났으니 빨리 네가 먼저 풀어,라는 신호로.


한참을 씩씩거리며 걷는데 플리트비체 호수에 빗방울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치자 톡톡톡 빗방울 소리의 향연이 울려퍼졌고 안개와 맡닿은 옥색 호수도, 오래된 너도밤나무  인도길도, 화가 난 나도 그 소리에 젖기 시작했다. 화가 나 씩씩댔던 발걸음이 느려지고 커플 신발이라 샀던 탐스 운동화가 아주 자연스럽게 물기를 머금고 그 풍경의 일부가 되려하고 있었다.






- 그 선배들이 왜 너희 집 앞에서 기다렸지? 네 어머니께서 전화하셨어.


 -몰라요. 그냥 왜그런지 모르겠어요.


- 그게 말이 되니? 네 일이잖아.


초등학교때 담임샘은 무척이나 신경질적이고 딱딱한 말투로 추궁하듯 물었고, 나는 뭐라고 말해야할지 난감했던 방과후였다. 여섯 명의 6학년 오빠들이 한 달 넘게 하굣길마다 따라와서 집에도 가지 않고 기웃거려 무서워 슈퍼에도 못가고 있어야만 했다. 왜 쉬는 시간마다 왜 무섭게 언니 오빠들이 우리 교실 앞에서 날 불러내고는 훑어보고 수군거렸는지, 왜 내 책상 위에 수많은 선물과 알 수 없는 수영복 입은 여자의 포스트가 올려져 있지 내가 묻고 싶었다. 아니, 어렴풋  알았지만 조심스럽지 않은 호감이 수치스러웠고 그 상황이 내가 감당하기는 무서웠기 때문에 말하기 곤란했다. 사람의 감정이란게 그런건가 보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한 무리가 열광하면 덩달아 괜찮은가 싶어 자신의 안목을 조정하며 좇아가는것. 같은 반 코흘리개들도 덩달아 의례 초등학교식의 귀찮고 피곤한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 그 애들이 뭘 달라거나 뺏거나 그러니?


- 아마도요.


그 무엇을 선생님은 돈으로 확신하셨고 나는 그제서야 텅빈 교실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달라고 했던 것은 안면트고 지내자는 관심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복도에서 만난 그 무리들은 나를 구석으로 몰아 세우며 '어휴, 쥐방울만한게.'라며 쥐어박으려는 찰나,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야, 야. 그러지마. 겁먹었잖아. 얘 미안했어. 가 봐.'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뜨며 비슷하게 생긴 여섯 명의 무리 중  유일하게 그 한 명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평온한 나날들. 조무래기들의 시덥잖은 장난들로 시끌벅적한 복도에서 나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학생으로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년의 시간이 지나  졸업식날 꽃다발을 건네던 숙모가 나에게 물었다.


- 너, 부회장이던 그 애 기억하니? 걔는 너 참 이뻐서 따라다녔다고 기억하던데. 전학갔잖아. 참 안됐어.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나무랄데 없는데.

엄마가 무당이라....


그였다. 여섯 명의 무리 중 가장 선하게 웃어줬었던 사람. 내가 유일하게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복도에서 왕자님처럼 나를 보내줬었던 사람.


더이상 이쁘지도, 더이상 인기가 많지도 않은  나는  초등학교를 찾을 때면 그가 하굣길에 기대어 날 기다렸던 담벼락을 조심스레 쓸어보게 된다.


 그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그  후로 당연하게 받았었던 배려와 관심에서 차차 멀어지는 삶을 살았다. 슬프게도, 시간은 제 멋대로  나를 변화시켰다.

 얼굴은 길어졌고  주근깨가 생겼으며 가느려서 그렇게 먹어도 안찌던 살은 방심한 사이 한 마리 코끼리가 연상돼는 다리를 가지게 만들었다. 아마도 내 유전자 탓이겠지. 나는 쓸쓸하게도 예쁜 애 옆에 서 있는 친구, 인기녀의 보디가드 친구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참을 걷다, 남편을 향해 뒤돌아 봤다.

그를 향해 웃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쁘다고 서슴지않고 말해주는 유일한 남자.

객관적 기준이란 그에게 통하지 않았나보다.


그는 어이없다는듯 웃었다.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물소리 가득한 거리를 둘이 걷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핑, 퐁, 푱. 누군가 마법거는 듯한 물방울 소리가 트레킹 끝날때까지 울렸다.




 평범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비범한 시작을 알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나는 이제 유치하게 누가 주인공인지 따위를 가늠하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고, 나와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의 삶이 참 쓸쓸했던 적도 물론 있었다. 마치 행운은 나에게 멀리 있는 남의 일처럼 빗겨가는 삶인듯해서.

  그러나 이제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나는 그 세상의 일원으로 충실히 삶을 살아가면 된다는 지론도 지니게 되었다. 하루하루 의미있는 삶,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나른함을 느낄 수 있는 삶. 그거면 됐다. 나의 하루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타박타박 오래된 나뭇길을 걸으며 다짐했다.

나는 앞으로 그에게 좋은 아내가 되어주겠다고.

그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도 부끄럽지  않고 편하게 웃을 수 있듯, 그도 나에게 편안함을 느낄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자고.


피곤하고 녹록지 않았을 하루의 끝에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그의 이야길 들어주는 아내가 되자고.


한 번도 먼저 화내거나 내 말을 자르거나,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하지 않았던  나보다 한 뼘 더 성숙했던 그를 위해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아기자기하게 살아보자고.


어찌됐든, 어떤 모습이든

지금이 우리의 리즈 시절이다.


 지금 이 순간을 미래의 내가 그리워할지도 모르니.

지금을 살 수 있는 보석같은 순간이니.


신혼 여행에서  늘 붙어 다니느라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 혼자, 또 같이 걸으며 우리들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혼자 걸으면 그 시간이 정지되고, 그  정지된 순간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걸으면 보인다, 나의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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