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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Feb 12. 2023

아버지가 게이바 사장이었다면

(영화리뷰, 스포주의, 제목 보고 실망하실 수 있음 주의)


메종 드 히미코. 2006년 이누도 잇신 감독이 만든 영화 제목이다. 오래전 주인공 시오리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게이들을 위해 지은 실버타운 '메종 드 히미코'.

그곳은 뜨거운 계절을 지나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든 사람들이 남은 생을 보내기 위해 오는 곳이었다. 조금은 특별한, 일상 속에서 흔히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않는 사람들. 게이, 트랜스젠더, 드랙퀸.


시오리의 아버지는 부재했던 시간 동안 게이바 사장으로 뭇 게이들의 추앙을 받으며 자신의 삶을 살았고, 많은 재산을 모아 실버타운을 세운 뒤, 그곳에서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옛 영광의 순간을 함께 했던 지인들과 젊은 애인 하루히코(오다기리, 조)가 지키고 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와 살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사오리는 어느 날 아버지가 나타나 제안한 실버타운 일자리가 달갑지만은 않다. 처음엔 거절하고 고민했으나 결국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 생계를 위해 아버지가 세운 실버타운 '메종 드 히미코'에서 일하게 된다. 영화는 그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담았다.


욕망, 삶, 죽음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게이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관객의 예측과 기대를 비틀어 버린다. 어떤 게이 남성의 인생사를 조망하기도 했다가, 그의 젊은 애인을 등장시켜 그 둘 사이의 애틋함을 보여주다,  이성애 딸을 등장시켜, 아버지의 젊은 애인과 딸 사이에 감정선을 엮어 버린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스토리에 어리둥절했지만 영화적 상상이라고 생각하면 수긍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옆자리에 누군가 그런다. 드라마는 현실의 반에 반도 안 된다고.


우리는 살고, 욕망하고, 좌절하고, 다시 욕망하고, 좌절하고, 다시 욕망하는 이 루트를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다가 언젠가는 죽는다.  그 반복 루트를 벗어난 자는 '붓다' 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죽어가는 이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나도 살고 싶지가 않아.. 사랑이란 게 그런 게 아니겠어..욕망이잖아..그게 전부인거잖아..나는 그런 게 필요해.."
영화 속, 하루히코의 대사 중에서


이 영화가 일본 영화고, 감독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건 이런 대사다.

나라면_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교육받고, 좁은 땅덩어리에서 '어떻게든 살아라'는 명령어가 코딩되어_ 아마도 죽어가는 애인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신약이 새로 나왔대. 그걸 써서라도 살아보자. 네가 힘을 내야 나도 힘이 나지."


죽어가는 와중에도 나를 봐서라도 힘을 내라고 종용하는 꼴이라니. 내가 들어도 힘이 빠진다. '그냥 편하게 죽어가고 싶어' 소리가 절로 나올지도. 죽어가는 애인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


어쨌든 죽음을 미화하는 문화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하루히코는 히미코의 죽음을 지켜보며, 같이 죽음을 욕망한다. 여기에 시오리의 건강함은 대척점을 이루며, 동전의 양면처럼 하루히코의 욕망을 성찰하게 한다. '사실 넌 살고 싶은 게 아니냐고.'


"욕망이 필요해, 미칠 듯이 먹어대는 식욕이나,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나"

 하루히코의 대사들이다. 죽어가는 히미코가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더 큰 실망감, 절망감으로 다가올 것을 알기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조차 어렵다. 대신 그가 답답한 방 안에서  창문을 열어젖혀 맞이한 신선한 바깥바람처럼 시오리를 통해 다시 활기를 찾는다.



그렇게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걸까? 둘은 가까워지다 몸으로 부딪혀 보로 한다. 어느 밤, 그의 방. 그녀의 방이었나. 마침내 마주한 두 사람. 조심스럽게 키스를 하고 부드럽게,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손가락 움직임. 벗겨낸 단추들, 스르륵 흘러내리는 옷깃,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에 초집중. 앵글이 인체의 부위, 부위를 크롭하며 서로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길 기대하며 침묵. 하루히코와 시오리의 마주한 얼굴, 멈춘 카메라.


"만지고 싶은 곳이 없지" 

시오리의 이 대사를 그녀에게 감정이입하고 들으면 시큰하다. 하루히코는 시오리의 몸을 욕망하지 않는다.


"좀 부러웠어.. 시오리가 아니라 호소카와 씨."

호소와는 시오리의 성씨. 히미코의 성씨이기도 하다. 그 둘의 연결 지점인 셈. 하루히코는 죽음이 가득한 실버타운 '메종 드 히미코'에서 시오리의 등장으로 신선한 바람을 좀 쐬고, 기운도 되찾았지만 결국 그가 욕망하는 건 히미코가 살아나는 것, 자신이 삶을 욕망하는 것이다.




영화가 다루는 인물들과 서사가 독특해서 관심이 갔고, 영상미가 아름다워 꽤 진지하게 봤다. 특히 정원 한편에 놓인 빨랫줄과 거기 널린 하얀 시트들이 석양이 지는 저녁, 바람에 살랑 나부끼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에도 노을이 지는 듯 편안해진다.


영화를 보다 보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해 보는 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사라진 아버지가 수 십 년이 지난 뒤, 암에 걸린 부유한 게이이자, 게이바 사장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면? 사이다처럼 톡소리는 탄산 같은 저항감으로 가득했던 이십 대에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면전에 대고 '우릴 그렇게 버리고 떠나더니, 이제 와서, 다 죽게 되니, 떠날 때 자기 마음 편하자고 나를 찾은 거냐?' 쓴소리를 쏘아댔을 수도 있겠지만, 뚜껑 열린 채로 살아온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젠 '쏘는 맛인 탄산, 저항감'도 다 빠져나가고 김 빠진 사이다처럼 '아' 외마디 말을 내지를 것 같다.

'아'

"아버지도 많이 힘들었겠네요."

앞뒤 맥락 싹둑  잘라먹고, 빠르게 용서와 화합의 절차를 밟을 수도 있겠다. 굳이 따져 물어보았자, 얻을 답이 뻔하다는 걸 알게 된 걸까?  묻고 따지고, 침묵으로 시위하고, 울고, 따지고, 다시 침묵하고, 아파하고 잠 못 이루는 애도의 시간들. 그럴 가치를 느낄까.


아버지가 어린 딸을 버리고 떠날 때의 나이를 가늠해 보자. 대략 서른 주음 되었겠구나.

서른 살. 입으로 가만히 소리 내어 본다. 지금의 나보다 십 년은 뒤로 가야 만날 수 있는 나이. 여전히 진로를 고민했고, 자꾸만 떠오르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나도 몰라' 망설였던 시절. 사회적 자아와 내 안의 자아 사이에서 갈등은 여전하지만 사회와 타협하면서 하루하루를 줄타기하던 나이. 그렇게 어느새 인생의 질서를 만들어 가던 시기. 나라면, 아마도 갈등했겠지만 가족 곁에 남아 있었을 거야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나.


그런데 잠깐, 가만. 아버지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내팽개친 탓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심란했던 삶과 네가 직면해야 했던 결핍은? 시오리 아닌 사람이 시오리의 분노의 과정을 싹둑 잘라먹을 순 없다. 분노의 리액션은 당연했다. 그것이 침묵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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