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일도, 돈도 아닌 상황

by 김솔솔

그때는 몰랐지만, 이 시기를 지나며 제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16년을 이어온 직장생활의 끝을 생각하게 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느 한순간의 결정적인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두어 달 동안, 저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올라왔습니다. 어떤 날은 사람 때문에 힘들다가, 어떤 날은 체력이 발목을 잡는 것 같고, 어떤 날은 돈이 아쉬웠습니다. 결국 그만둔 이유를 떠올려 보면 사람도, 돈도 아닌 ‘상황’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어느새 KTX를 타고 출근한 지도 3개월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플랫폼 위에서 맞이하던 찬바람도,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출근해 해가 진 뒤에 퇴근하는 일상도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익숙해졌다는 말은 어느 순간부터 버텨내고 있다는 뜻에 더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1월의 중요한 제품 출시를 앞두고 회사의 시간은 빠듯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신제품을 내놓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들 중 하나는 기존 재고를 모두 소진하고, 관련 SKU를 단종시키는 일입니다. 특히 재고가 평균 월별 판매량을 크게 웃도는 경우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별도의 영업 전략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출시 예정 제품의 구형 재고 일부가 과도하게 쌓여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부서에는 곧바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책 논의가 이어졌고, 여러 솔루션이 제시되었지만 자연 판매가 아닌 방식에는 늘 비용 투입이나 법·제도적 리스크가 따라붙었습니다. 회의가 끝날 때마다 해결책은 남아 있었지만,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크고 작은 문제들은 회사 생활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며 최선이든, 차선이든 대안을 마련해 왔습니다. 다만 그해에는 같은 장면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상황은 당시의 나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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