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해 두었던 공간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베란다와 세탁실, 책장 맨 위 칸. 평소에는 손이 닿지 않던 공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대충 쌓아두었던 제품 박스와 잘 사용하지 않는 생활용품들을 쓰임에 따라 분류하고 자리를 정해 가지런히 정렬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이 정리되자, 머릿속도 같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리, 정돈, 분류, 체계화, 구조화. 기획안과 보고서를 만들고, 프로젝트 일정을 정리하며 개념을 잡고 일하는 방식을 배웠던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력 신입으로 입사해 조직문화 OT를 거치고, 직무 배치를 통해 현업에 투입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배우고 부딪히고, 수정하고, 단계별 목표에 따라 성과를 도출하고 점검하는 과정이 반복되었습니다.
일이 익숙한 연차가 되었을 때는, 배워서 하는 일이 아니라 숙련된 나만의 역량으로 기대치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도전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체계를 잡고 구조화하며 프로젝트 전반을 관리하고 이끄는 일이 더 즐거워졌습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이미 흐름을 그려보고, 요청을 받으면 시간과 비용, 노력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먼저 계산해보는 식이었습니다. 누가 이 업무의 적임자인지, 어떤 순서로 일을 풀어야 효율적인지 자연스럽게 시뮬레이션하듯 판단하곤 했습니다.
일과 일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여유 공간, ‘룸(room)’을 만들어두고 그 틈에서 새로운 기획을 떠올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즉각 대응해야 할 때에도, ‘룸’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스트레스 정도와 업무 성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런 성과들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가까워 평가자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았고, 보상이나 칭찬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스스로 놓치기 쉬웠고, 방향을 잃은 채 자책하거나 회사를 탓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퇴사가 확정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난 15년간의 인사평가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매해 인사평가 결과를 받을 때, '나는 올해 정말 최선을 다했으니 칭찬만 적혀 있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마음이 한 켠에 있었습니다. 이런 근거없는 기대감은 실망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15년의 평가를 연대기별로 살펴보니, 세상의 잣대는 생각보다 정교했습니다. 정체되어 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삶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하얗게 불태웠던 해에는 그에 걸맞은 훈장이 남겨져 있었고,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킨 건 동료들의 언어였습니다. 숫자나 결과로 환산되지 않았던 일들이,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언어로는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저를 ‘흔쾌히 협업에 응하며, 몰입도를 높이는 동료’로 기억해주었습니다. 그 기록은 직접적인 보상이나 칭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이었습니다.
사무실이 아닌, 말끔히 청소된 나만의 공간에 앉아 있습니다. 먼지를 털어낸 자리에 나만의 룸(ROOM)이 생겼습니다. 여백 위에 여유가 잔잔히 흐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흥얼거립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