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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핑 20년 차, 내 타자 속도는 여전히 600타

1일1생각 #38

by 강센느

내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 건 대략 20년 전 초등학생 때였다. 세진컴퓨터가 만든 '세종대왕'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이름의 개인 PC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는 문서작업을 할 일이 없는 초딩이라 키보드에 손대는 일이라곤 게임할 때 방향키를 쓰는 정도였다.



300타


그렇게 키보드 치는 일에 큰 관심 없이 컴퓨터 게임만 즐기던 어느 날, 학교에서 컴퓨터 과목 시간에 선생님의 지시로 타자연습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한컴타자연습의 게임 기능이 은근 중독성이 있어서 이때부터 나는 타자에 슬슬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그때 내 타자 속도는 200타와 300타를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고, 한컴타자연습 게임이 금방 질려버려서 최고 기록인 300타에서 나의 타자 실력은 멈췄다.



500타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인터넷 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게임도 CD게임이 아닌 온라인 게임이 등장했다. 나는 여러 온라인 게임을 접한 끝에 리니지라는 게임에 빠졌다.


온라인 게임은 CD게임과 달리 게임을 함께하는 유저들과 소통하는 재미가 있었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키보드로 채팅을 쳐야 했고, 이때부터 나는 한컴타자연습을 하지 않아도 타자를 쳐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영어를 몰라도 미국으로 유학 가면 생존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영어 실력이 향상되는 것처럼, 나의 타자 실력도 이때 월등히 늘기 시작했다. 당시에 한컴타자연습으로 타자 속도를 확인해보니 500타를 넘나들었다.



800타


고등학생 때, 반에서 갑자기 타자 속도 경쟁이 붙었다. 점심시간에 누군가 교실에 있는 컴퓨터로 자신의 타자 속도를 뽐냈고, 자신이 더 빠르다는 친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그 열기가 과열된 것이다. 그 경쟁이 생각보다 오랜 기간 지속되어 나도 이때 1등을 거머쥐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당시 경쟁종목은 단타(한 문장)였고, 나는 노력 끝에 800타를 달성했다. 단기간에 그렇게 높은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음과 같았다.


1) 단타 속도 측정 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런 문장들을 써머리 해서 집중 연습했다.

2) 내가 습관적으로 오타를 내는 글자들이 있었는데 이런 부분들을 의식적으로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3) 위 1~2를 염두에 두고 반복적으로 연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에 900타를 넘긴 친구가 있어서 나는 1등은커녕 3등도 못했다.



600타


그리고 요즘, 나의 타자 속도는 600타, 거의 10년째 변함이 없다. 800타까지 달성했던 고등학생 때에 비해 타자를 치는 일이 훨씬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타자 속도는 그때보다 오히려 줄었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가 과거에 타자 실력이 월등히 향상됐던 시기들을 돌이켜보니 어느 정도 그 의문에 대해서 답이 나왔다.


우선, 내 실력이 향상됐던 시기에는 공통적으로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300타 때는 한컴타자연습 게임을 클리어하겠다는 목표, 500타 때는 게임 유저들과 원활하게 대화하고 싶다는 목표, 800타 때는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목표. 그래서 나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는데 요즘엔 사실 그런 목표가 없었다. 600타 정도면 직장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정도의 속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의식적인 연습'이 있었다. 800타 시절을 돌이켜보니 나는 실력 향상을 위해서 의식적인 연습을 했었다. 의식적인 연습이란 그냥 연습과는 다르다. 사람은 무언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개개인의 선천적 역량에 따라 반복 훈련만으로도 숙달할 수 있는 능력치가 있는데, 이 능력치까지 도달하는데 필요한 것은 반복 훈련이지만 그 이상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300타, 500타 시절까지 반복 훈련을 했었다. 그때는 그저 키보드를 자주 치기만 하면 실력이 향상됐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800타를 달성하기 전까지 500타에서 5년 정도 정체된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는 온라인 게임을 자주 해서 타자를 매일 쳤음에도 불구하고 타자 속도가 늘지를 않았었다. 돌이켜보니 이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딱히 뚜렷한 목표가 없었고, 그렇다 보니 의식적인 연습도 없었다. 그래서 나의 타자 속도는 나의 기본 능력치인 500타에 멈췄던 것이다.


하지만 800타 시절에는 친구들을 이기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고, 연습을 할 때도 내 기본 능력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훈련방법을 강구했다. 자주 출제되는 문제를 분석하거나, 자주 틀리는 부분을 집중 훈련하는 식의 방법 말이다.



타자 연습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생각이 이쯤 닿으니, 다른 모든 일을 할 때도 이처럼 뚜렷한 목표,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서 실력을 향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회사 업무, 큰 목표의식 없이 하는 운동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뚜렷한 목표를 잡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식적인 연습을 한다면 800타를 달성했던 그때처럼 믿기 힘든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반대로 그러지 않는다면 20년이 지나도 600타에 멈춰있는 나의 타자 속도처럼 모든 일이 '기본 능력치'에 맞춰 세팅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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