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버린 종이

티슈 제작기 ⑥

by sen

⑤편에서 이어집니다


『티슈』에는 표지와 내지 사이에 속표지 역할을 하는 [트레팔지]가 들어간다. [트레팔지]는 흰색의 반투명한 종이인데, [트레이싱지]와 달리 좀 더 광택이 있고, 만졌을 때 기름이 묻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재질이다. 물론, 이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게 된 건 사건이 터진 후였다.


[트레팔지]에 컬러 테스트


『티슈』는 판형도, 제본 방식도, 구성에도 아무런 제한이 없었기에, 그때그때 아이디어를 내며 필요한 부분을 채워 넣었다. 우린 서로 가볍게 제안하고 쉽게 받아들이곤 했다. 속표지로 [트레팔지]를 사용하기로 한 것도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표지 다음 장에 설명 장이 바로 나오면 좀 그렇지 않아? 그 반투명한 거 하나 넣을까?”

“그럴까요? [트레팔지]였나, [트레이싱지]였나?”


그렇게 3p엔 [트레팔지]가 들어가게 됐고, 거기에 『티슈』의 로고를 얹었다.



WIPE, WRITE AND READ



당초 계획이었던 ‘1월에 마무리’는 요원해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2월 중순이 되었다. 우리는 을지로의 한 카페에서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크로스체크를 하며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이상이 없다면, 근처 인쇄소에 인쇄와 제본을 맡기면 된다. 그렇게 작업이 얼추 마무리되는 상황이었다.


을지로의 카페, 바쁜 손


그러던 중, 추가로 넣어야 할 내용이 생겼다(이것 역시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zine의 정보를 담은 텍스트 뭉치가 뒷부분에 들어가면 더 구색이 맞을 것 같았다. 문제는 페이지 구성이 이미 끝난 상황이라, 추가할 공간은 뒷표지의 앞면, 그러니까 ‘표3’뿐이었다. 하지만 표3에 담기엔 내용이 다소 많았고, 우측 페이지인 표3보다는 좌측에 들어가는 편이 더 좋아 보였다. 결국 우리는 [트레팔지]를 뒷부분에도 넣어 전체 구성을 한 장을 늘리기로 했다.


앞쪽에 들어가는 [트레팔지]는 1월에 이미 인쇄를 마친 상태였다. 다행히 여유분이 남아 있었고, 추가할 내용의 디자인도 마무리되어 있었다. [트레팔지]가 앞과 뒤에 수미상관 형식으로 배치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트레팔지] 인쇄가 가능한 인쇄소를 찾기 위해 열 군데가량 전화를 돌린 끝에, 바로 가능하다는 곳을 발견했다. 그러나 사장님은 우리가 가져간 [트레팔지]를 보며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인쇄가 가능하긴 했지만, 종이가 주름지며 우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열 토너 방식이 [트레팔지]를 변형시키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트레팔지]의 소재 때문인데, 펄프 베이스인 [트레이싱지]와 다르게 [트레팔지]는 합성수지, 즉 석유로 만든 종이였다. 강한 열이 작용하는 인쇄 방식에 [트레팔지]가 견디지 못했던 것. 사장님은 레이저 인쇄가 적합할 거라 하셨다. 우리는 인쇄소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트레팔지] 인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테스트용 종이에 인쇄한 모습. 종이에 주름이 생기고 잉크가 번졌다.



우리는 새롭게 알아가는 비용을 확실히 치러야 했다. 충무로에는 인쇄소가 정말 많았다. 하루 종일 대여섯 군데를 전전했지만, [트레팔지]는 프린터에 끼거나, 잉크가 번지거나, 종이에 주름이 생기는 문제가 반복됐다. 생각 이상으로 시간을 많이 소모했고, 결국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당초 계획은 당일에 모든 인쇄를 마치고 제본까지 맡기는 것이었지만…


➊ 처음 갔던 서영원인쇄소(단가가 가장 저렴했고, 다른 인쇄소들보다 주름이 적게 생겼다)에서 주름이 잡힌 상태로 인쇄를 진행해 제본 일정을 맞추는 것. 이 경우 모든 트레팔지에 주름이 생기고, 몇 장의 로스가 추가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미 로스가 상당히 생겨 애초 계획한 제작 수량을 맞추기는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번 고생할 필요 없이, 그날 당일 모든 게 끝난다는 장점이 있었다.


➋ 인쇄소를 컨택하다 알게 된 피엔피 인쇄소에서 UV 방식으로 인쇄하는 것. UV 인쇄는 자외선램프로 잉크를 순식간에 경화시킨다. 주름이 생기지 않는 것은 물론, 높은 품질의 인쇄가 가능했다. 하지만 단가가 매우 비쌌다. zine 전체를 인쇄할 수 있는 비용을 들여 [트레팔지] 한 장을 인쇄할 수는 없지 않은가?


➌ 1월에 처음 앞쪽 [트레팔지]를 인쇄했던 검증된 인쇄소에 맡기는 것. 이곳은 최소한 종이에 주름이 생기지는 않았다(아마 레이저 방식일 것이다). 이 경우 제본 일정을 수정해야 했다. 인쇄소의 위치가 을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당일 의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는 고민 끝에 ➌을 택했다. 주름진 [트레팔지]로 인쇄된 『티슈』를 두고두고 아쉬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2월의 절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역시 쉽게 되는 일은 없었다.

이전 05화sen님, 전에 쓰던 안경은 어디 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