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슈 제작기 ⑤
상무님은 가끔 나를 보면 물으셨다. “sen님, 전에 쓰던 안경은 어디 갔어요?”
이 질문을 받으면 나는 도망쳤다. 실제로 액티브하게 도망친 건 아니고, 적당히 둘러대기 바빴다. 그저 쓰던 안경을 벗은 것뿐인데, 상무님은 이 질문을 생쥐를 발견한 뱀처럼 (나의 체감상) 만날 때마다 하셨다. 상무님이 기억하시는 안경은 내가 면접을 봤을 때, 그렇게 입사해 회사를 다니던 초창기에 썼던 안경이다. 투명한 몸체에 철로 된 브릿지가 있는, 조금 독특한 형태였다. 이 말을 단지 인사치레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다년간 상무님을 뵈어 온 경험상 의미 없는 겉치레를 반복할 분이 아니셨다.
아마도, 함의는 이거였다. “안경을 벗은 건 어떤 성장의 결과물인가요? 좀 보여주세요."
겉모습만 바뀐 건지, 내면의 성장이 있던 건지 궁금하셨던 거다. 나는 왜 안경을 벗었을까? 내면에 변화가 있던 걸까? 나는 나아진 걸까.
‘나아짐’을 추구하는 것과 실제로 나아지는 건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설령 달라졌다 해도, 겉모습의 변화보다 훨씬 알아차리기 어렵다. 상무님의 면전에 대고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나 역시, 성숙 없는 변화는 죽기보다 싫었다.
2024년 봄, n년차 직장인인 난 다시 학생이 됐다. 여전히 성장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출근을 한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어째선지 내 사이클은 학기와 방학이라는 기준으로 돌고 있었다. 업무에 쏟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학교는 일주일에 두 번 나갈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학기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로 한 번 더 쪼갤 수 있고, 각 주 사이마다 과제를 넣으면 꽉 찬 한 학기가 완성된다. 첫 학기엔 수요일 저녁과 금요일 저녁에, 각각 시각디자인론과 디자인 트렌드 수업을 들었다. 2024년 여름, 유난히 학기 말 강의실엔 모기를 비롯한 날벌레가 많았다. 공기는 눅눅했고, 에어컨은 고장인지 시원한 바람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농구장 학생들의 외침은 강의실 안을 메아리치고 있었고, 이윽고 교수님의 목소리와 융합해 몽롱함을 유발했다. 금요일 저녁, 날아다니는 벌레를 쫓으며, 졸음과 싸워 가며 대학원에서의 첫 종강을 맞이했다.
학기의 끝은 곧 방학의 시작이다. 방학 역시 꽉 채우고 싶었다. 이 흐름대로 계속 달리지 않으면, 기껏 채워 넣은 랩 속의 야채와 고기, 소스가 흘러 빠져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공부 자체에 대한 몰입 같은 것들. 그걸 방학에도, 그 이후에도 유지하고 싶었다. 틈틈이 필기한 노션을 다시 정리하고, 주말엔 일부러 더 책을 읽었다.
난 들떠 있었다. 지식이 채워지는 것 자체에 대한 희열도 있었지만, ‘성장하는 것'에 대한 체감이 나에게 포만감을 줬다. 하지만 지식을 받아들여도, 그것이 내 일부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학습의 ‘습’은 익힐 습習이라고 한다. 익힘은 밥에 뜸을 들이듯 천천히 이루어지는 거라고. 흔히들 알고 있는 ‘우매함의 골짜기’ 그래프처럼, 깨달음의 평온에 이르기 전에는 깊은 절벽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성장의 희열과, 그것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지 못한 채 예전 그대로인 듯한 내 모습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전철 안에서 멀어지는 플랫폼을 보며, 아직 거기 서있는 나를 본다.
그래서일까? 난 더욱 '학생 같이' 행동하게 됐다. 정확히 정의하긴 어렵지만, 희열이라는 고양감은 대담함으로 치환됐던 것 같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때 좀 더 거침없어졌음을 느꼈다. 새로운 작업이든, 스터디든, 여행이든, 만남이든 말이다. 때론 "정신연령도 학생이 되어 버린 거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었다.
그리고 6개월, 또 한 번의 사이클이 지나갔다. 계절은 차게 가라앉았고, 주위는 조용해졌지만 그때의 무더움과 소란스러움은 아직도 내 주위에 머무는 듯했다. 그래서 『티슈』에 남기기로 했다. “난 달라졌을까?” 늘 하는 질문이지만, 이 말의 무게감은 해가 갈수록 버거워진다. 내면의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꾸만 지난여름이 떠올랐다. 그때의 시끌벅적함은 아무래도 성숙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난 조급했고, 한편으론 미숙했다. '그것도 과정이지', 하고 털고 돌아서는 건 도무지 할 수 없었다. 내 감정을, 내면을 마주 보아야 한다고...
그래서 지난여름은 '엉망'이었다고, 작은 zine에 내 조촐한 성장을 기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