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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위하여

기업의 서체 배포와 한글 기념

by sen

한글날, 우아한형제들 블라인드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네이버를 비롯해 많은 회사들이 한글날을 맞아 로고플레이를 하던 터였다(보통 영어인 서비스 이름을 한글이나 한국어로 바꾸어 표기하는 식이다). 뱅크샐러드는 올해도 '은행겉절이'로 로고와 앱 이름을 바꾸어 화제가 됐다. 이제는 이러한 문화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한글날에 '으레 하는 놀이'가 되어가는 듯하다(특정일에 하는 비슷한 류의 놀이로는 네이버웹툰이 만우절에 웹툰 썸네일을 장난스럽게 바꾸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요즘도 하나?). 물론 기념하는 대상이 '한글'인지, '한국어'인지 짚어 볼 필요는 있다. 한글날에 유독 외래어를 순우리말로 교정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지만, 고지식하게 보일 수 있겠으나 alphabet과 language는 엄연히 다르다.





아이러니컬 한 건 배민은 어제― 그러니까 한글날의 전날인 8일, 12번째 자사 서체인 '꾸불림체'를 배포한 바 있다. 한글날에 맞춰 서체를 배포하는 회사라니. 그것도 한글과 직접적인 관련이 적은 배달 서비스 기업인데 말이다.


새로운 한글 서체를 만드는 건 한글을 기념하는 최고의 행위 중 하나이고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일 테지만, 어째선지 블라인드에선 아쉬움을 토로하는 글이 올라온 것이다. 글쓴이의 직무나 배경 따위를 파악하기 어려운 블라인드에 쓰인 글이니, 어떤 상황과 의중에서 썼는지 정확힌 알 수는 없다. 나름의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으레 하는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게 아쉬워서일 수도 있고, 고객들에게 '우리도 한글을 사랑하는 기업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라는 어필을 하지 않는 것만 같아서 생긴 불만, 혹은 게시글의 내용처럼 회사에서 추구하던 문화가 사라지는 것 같아 허탈감 혹은 경각심이 든 것일 수도 있겠다.


폰트 다운로드는 https://www.woowahan.com/fonts



우아한형제들 내부엔 영어, 알파벳 사용을 지양하고 한국어, 한글 사용을 권장하는 문화가 있다. 같은 표현도 되도록 우리말로 풀어서 하고, 대외 행사의 이름도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다(예를 들면 Conference ⮕ 콘퍼런스로 쓰는 식). 내부에서 사용하는 MS(Market Share), MP(Market Place) 같은 업무 용어를 모두 한글로 대체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겠으나(업무의 효율성 역시 헤쳐선 안되니까. 그 기준 또한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한 것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최소한 ASAP 같은 줄임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기보다는 의식하며 지양하는 편이다. 이건 분명 독특한 문화였다.


내규가 바뀐 것은 없지만 어째선지 요즘, 점점 이런 문화를 지탱하는 힘이 약해지는 걸 느낀다. 일상적인 업무에서 갈고 닦으며, 보전해 가는 것은 분명 구성원들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그 큰 틀을 정하고 분명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구성원들의 단합된 마음 만으로는 어렵다. 배달의민족이 지난달 출간한 『밥 벌어주는 폰트』엔 자사 서체를 제작하는 것의 출발이 창업자의 강한 의지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브랜딩이 그러하듯, 문화 역시 헤드가 가진 가치관과 연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새로운 경영자가 그러한 문화를 도외시한다면, 그것이 10년 이상 이어온 가치라도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12개의 자사 서체 라인업



어찌 됐든 우형은 13년 동안 12개의 한글 서체를 세상에 내놓은, 한글 사랑이라면 그 어떤 회사에도 뒤처지지 않는 기업이다. 새로운 한글 서체가 만들어질수록 한글의 표현과 활용폭은 다채로워지고, 그 저변은 넓어져간다. 서체를 연구하고 묵묵히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는 것(기업이 리소스를 들여 제작한 서체를 무료 배포하는 결정을 내리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평소에 한글 사용을 독려하는 문화를 가지고 유지하는 것. 일상적인 존중. 이거야말로 한글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지 않을까?


한글날을 기념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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