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서랍장을 열어주는 마법의 주문, 문득.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12월 24일, 시간은 오후 5시 23분.
회사에서는 대표님 및 임직원분들의 브랜드 리뉴얼 관련 회의 한창 진행 중이고, 난 이 회의의 결과와 전달 사항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굉장히 몽롱한 상태로, 멍- 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책상 한켠에 커피 한 잔 올려두고. 아, 식었네... 이따가 저녁 먹고 커피에 물을 조금 더 부어서 따뜻하게 데워와야겠다.
내가 몽롱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 잡힌 회의 때문이었다. 브랜드 리뉴얼에 따라 내용이 바뀐 브랜드 소개서가 필요했고, 이전에 작업된 소개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것도 며칠 만에. 이 작업에서 나는 기획과 구성, 워싱 작업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일의 시작과 끝은 꼭 나를 거쳐야만 한다. 제시간에 맞추려면 새벽 늦게까지라도 해서 마쳤어야 했고, 그래서 새벽 2~3시까지 작업한 브랜드 소개서를 회의에 참석하는 실무자에게 오늘 오전 일찍 넘겼다. 혹시 모르니 오타를 한 번 더 봐달라며 크로스 체크와 소개서 출력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같이 작업한 팀장님께는 "장렬하게 전사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제 잠만 자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런 건 좀 비껴가도 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마늘 빻는 소리와 발뒤꿈치로 바닥을 딛는 소리와 볼링공 같은 무게감 있는 돌덩이를 굴리는 소리까지, 소음으로 온갖 기교를 부린 '소음 판타지아'의 주인공이 오늘 이사를 간다며 짐을 정리하느라 낼 수 있는 소음의 데시벨을 넘어선 듯한 충격파를 전달해주었고, 멈추지 않는 회사 직원분들의 업무 전화와 단톡방의 알림과 아무튼 모~든 소리. 이 소리를 듣고 넋이 안 나가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 휴머노이드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
아무튼 몽롱하게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5시 49분. 회의의 결과를 전해 들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 당당하게 딴짓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워드를 켜서 글을 써 내려가던 중,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대리님처럼 문장을 쓰지 못하겠어요ㅠㅠ 저한텐 어려운 일이네요ㅠㅠ"
기획안을 쓰거나 홍보용 보도자료를 쓰거나 '글쓰기' 작업을 해야 하는 날이면 후임이 몇 번 저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 말이 이 타이밍에 딱 떠오른 것이다. 사실, 내 입장에선 문장을 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방송 바닥 10년에 온갖 글을 작성해보면서 여기에 내 생각 한 스푼 내 느낌 참기름처럼 한 바퀴 쪼록 둘러주다 보니 생긴 습득 능력이랄까. 하지만 기간을 생각해보자. 자그마치 10년, 아 이제 10년 넘어가지. 그래 10여 년.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문장력을 갖추게 된 것이렸다.
"네가 아무리 늘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동안의 경험과 내공은 무시할 수 없는 거야. 거저 얻은 게 아니란다."
왜 이렇게 말이 많냐며 귀를 막던 부모님도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주관적일 땐 한없이 주관적이고 객관적일 땐 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처럼 냉정하게 표현하는 분들이니까.
그리고 또, 문득 떠올랐다.
'내가 막내작가였을 땐 대체 어떤 문장을 썼었지?'
자료조사와 섭외와 자잘 자잘한 업무들이 많았던 그때 그 시절.
내가 처음으로 문장이란 걸 써본 게 언제인가 되짚으려니, 안타깝게도 나의 모든 자료가 담긴 USB를 아주 시원하게 날려버린 탓에 찾는 게 어려워졌고. 아, 네이버 N드라이브에 가면 뭐라도 있을 텐데, 하고 폴더를 전부 열어보니 다행히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쓴 첫 문장은 방송사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된
'심령 솔루션 프로그램'에 있었다.
무속인과 함께 영적 존재에 대해 다루던 그 프로그램들 말이다.
새삼 놀랐다. 내가 무슨 배짱으로 이 프로그램을 했을까.
그때 내가 무엇을 어떻게 썼을까.
10년 전, 방송작가로서 처음 경험했던 그 시간 그리고 그 문장들.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오랜만에 들춰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