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윤당 Aug 17. 2023

'낭비'에 대해서

23년 1월 9일의 기록을 펼쳐둡니다.

취미로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가끔 타로점을 봐주곤 하는데, 좋은 내용을 담은 카드를 뽑으면 참 좋겠지만 어떤 카드를 뽑을 때마다 괜히 내 마음이 다 안타까워지는 카드가 있다. 카드엔 창가 좁은 선반에 겨우 놓인 컵 9개와 이를 바라보는 한 귀족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오래간만에 마음에 드는 컵을 찾고는 모아두려고 계속 사들였더니 놓을 공간이 부족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카드에서 말하는 컵은 관념, 마음을 뜻하는데 아하. 그 남자는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을 계속해서 쏟는 것이었구나. 그러니까, 마음을 낭비하고 있는 거구나.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관계에 마음을 쏟는 일들이 많다. 내가 조금 더 진심으로 다가간다면,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안고 걸어간다. 걸음의 종착지에 내가 예상한 그림이 펼쳐진다면 참 마음이 놓일 테지만, 이런 건 항상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간다. 이럴 때마다 힘든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겪고 난 후 내 몸을 둘러보면 어디 하나 성하지 않은 곳이 없다. 내가 애를 쓴다고 해서 나를 둘러싼 사람들 모두가 애를 쓰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늘 던져왔다. 온몸을 다해, 온마음을 다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았던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파악하고는 앞으로 그만 낭비하기로 했다. 그 방안 중 하나로 모든 것에서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다. 거리를 두면 오히려 더 멀어지지 않을까 불안감도 크고 걱정됐는데, 이건 정말 큰 오산이었다. 수많은 버스가 오가는 버스정류장처럼, 수년이 지나도 여전한 가게들처럼, 묵묵히 조용히 싹을 틔워 자라는 나무들처럼. 늘 곁에 있지만 가까이 있지 않아도 필요할 때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존재, 기억이 문득 떠올랐을 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존재. 오히려 거리를 둠으로써 나의 낭비벽은 줄었고, 사람들도 사회에서도 나를 존중해주기 시작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지만 아무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은 늘 불안함의 연속이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