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지만 친숙하지 않은, 친해지고 싶지 않은 그것
인생은 늘 불안함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왜 '불안함'일까. 불안이라는 단어 대신 갈림길, 선택, 방향이란 단어도 많이 쓰이는데도. 아마, 불안함이라는 건 자의적인 행위에 수반되는 감정이기도 하겠지만, 타의적으로, 나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어쩔 수 없이 강제적인 행위에 수반되는 감정에도 해당되니까. 그래서 '불안함의 연속'이라는 문장이 더 널리 쓰이는 게 아닐까. 불안함이 주는 어감도 그렇고.
이 '불안함'은 심장에 저릿한 느낌과 다양한 떨림을 주곤 하는데, 기뻐서 느끼는 불안함과 하지 못해서 느끼는 불안함과 들킬까 두려운 불안함과 누리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게 아쉬운 불안함, 등등. 나는 그중에서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게 되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맞이한 불안함'이란 유형을 겪고 있다. 문장 안에 내가 겪고 느낀 걸 담으려니 본의 아니게 길어졌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한 표현은 없을걸.
수족이 잘려나가 한순간에 무능력한 사람으로 되어버리고 마는, 나는 그저 소비물품일 뿐이었나 하는 일말의 자책감. 서른여섯 해를 보내고 있는 사회인이라 하더라도 이 감정은 친숙하지만 친해지고 싶지 않은, 정말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불청객.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이를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 남은 내 짐들을 하나하나 빼고, 비워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글바글했던 책상이, 새로운 누군가가 앉아도 상관없는 자리가 된 순간. 생각보다 마음이 홀가분했고, 섭섭함보단 시원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마음이 깨끗해도 될 일인가 싶은데, 그건 내가 많이 내려놓아서가 아닐까.
개발자가 아니라 비개발자인, 기획자이긴 하지만 PM 같은 제품, 프로덕트를 만드는 기획자가 아닌 콘텐츠, 스토리텔링, 관계를 만드는 나는 늘 불안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지내왔다. 왜 나는 그런 상황 속에 놓여야 했을까, 놓여야만 하는 게 맞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바뀌지 않았다. 불안하더라도 나는 내가 잘하는 걸 해야 재미와 흥미를 느끼고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IT와 테크가 중심이 되고 이를 강조하는 세상이라 하지만 내 세상은 '인간'이란 존재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곳이라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인간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의 '편리성'보다는 인간의 '관계'에 좀 더 충실하고 싶다는 것을.
MBC <아무튼, 출근>에도 나왔던 유투버 무빙워터 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란 무엇일까. 내가 가진 조건들, 능력이나 스킬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보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꽤 많으니, 이런 부분에서 접근할 게 아니라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포함하면 나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와의 인연,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사람에게만큼은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같이 일하고 싶고, 시간을 보내고 싶고, 추억을 쌓고 싶은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아닐까.
누군가는 나의 '관계 중심적' 태도에 대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냐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안 하면 남는 건 후회뿐이니 아쉬움을 남기기 싫어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다고 했었다. 이건 내가 스스로 일궈내는 것이라고,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은 순수한 나의 힘이라고. 밀물처럼 몰려왔던 서러움이 무빙워터 님의 말씀을 듣고 한꺼번에 사그라들었다고 해야 하나.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나는 앞으로 또 어떤 시간을 보내고 힘을 쓰려할까. 아무튼, Winter is coming이라며,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차가울 것이라고 했지만 아니, 내가 맞이한 겨울은 따뜻하고 포근할 것 같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아주 잠깐일 뿐, 꽁꽁 싸매고 묵묵하게 걸어 나가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