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려하지 않은 연인 1
====================[들어가며]
“서로를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더 깊이 다가서는 마음, 그 첫 장이 열립니다.”
====================<본문>
처음 와 보는 카페인데 커피 맛이 괜찮다. 크림도 폭신하고 적당히 달달한 게 오늘 같은 주말에 머리 비우면서 마시기에 상당히 기분 좋은 맛이다.
달달한 커피가 들어가니 거의 자동으로 디저트가 당긴다. 아까부터 먹고 있던 허니브레드를 집기 위해 포크를 찾았다.
"어, 뭐지 이게?"
눈으로 보지 않고도 찾기 좋도록 트레이 위에 가만히 잘 놔뒀던 포크 옆으로 이질적인 물체가 잡혔다.
짧은 스틱인 줄 알고 손으로 쭉 쓸 듯이 훑었는데 끝이 가늘고 엄청 친숙한 모양이다.
"뭐가?"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가 묻는다. 하긴, 나도 그녀도 눈이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니 그녀라고 해서 나보다 먼저 이 물건의 존재를 알았을 리 없다.
"트레이 위에 연필이 있는데? 여기도 손님들한테 좋아하는 음악 신청 같은 거 받나?"
트레이에서 찾은 연필을 만지고 있자니 문득 손님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메모지로 받아서 LP판을 찾아 틀어주던 LP바가 떠올랐다.
"아! 네, 맞습니다. 이걸 설명을 못 드렸네요. 신청곡 메모해서 저한테 주시면 틀어 드립니다.
두 분은 저한테 편히 말씀만 해주세요. 먼저 신청한 손님들 노래 다 끝나면 바로 들으실 수 있게 추가해 드릴게요."
마침 우리 테이블 근처를 지나가던 카페 사장님이 내 말을 들었는지 다급하게 설명한다.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를 테이블까지 가져다주기도 하고, 허니브레드를 한입 크기로 잘라주면서 포크와 접시, 음료의 위치를 세세하게 알려주기도 하시던 분이다.
그런데 습관처럼 트레이에 올려서 내보내던 연필의 쓰임새 하나 깜빡하고 못 설명했다고 이렇게 당황하시는 걸 보니 오히려 내가 다 당황스럽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이런 부분 하나씩은 놓칠 수도 있지 뭘 그러시나.
"아! 지금까지 나오던 노래들이 다 신청곡이었구나. 어쩐지 이 카페 노래들이 다 제 취저였어요."
굳이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녀의 목소리에 가득 묻어 있는 웃음기를 느낀다. 모르긴 몰라도 만면에 미소가 넘치고 있으리라.
그나저나 취저? 취향 저격? 그건 뻥이다.
내가 알기로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카페에서 나오던 노래들 대부분은 그녀의 취향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지금의 사장님은 그녀가 하는 말보다 그녀 특유의 흘러넘치는 활기와 웃음에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함께했던 시간 속 언제나, 누구나가 다 그랬듯이...
우리가 신청한 노래까지 다 들으니 딱 맞게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차도 잡혔고,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면 된다.
자리에서 일어난 뒤, 걸음을 옮기기 전에 그녀가 먼저 내 팔을 잡는다.
연인끼리 다정하게 손이나 잡고 다니면 될 일이지, 어색하게 왜 팔을 잡나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안전하게 다니기에는 이 자세가 제일이다.
안내보행이라고 불리는 이 자세는 안내하는 사람이 앞에 서고 시각장애인이 그 반보 뒤에 서서 앞사람의 팔꿈치 위를 잡는 것이다.
이러면 손을 잡고 다닐 때보다 앞사람이 이동하면서 생겨나는 몸의 움직임을 손으로 더 잘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특히 계단을 오르내릴 때 아주 유용하다.
어차피 둘 다 앞을 못 보는 처지라면서 굳이 누구는 안내하고 누구는 따라갈 이유가 무엇이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흰지팡이는 지금 내가 쥐고 있다.
카페에 들어오면서 출입구의 위치를 대략 기억해 두었다.
일부러 그 위치를 잊지 않게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선택하기도 했다. 마침 창가에 있던 자리여서 오후의 햇살을 즐길 수도 있었던 나름의 명당이었다.
지팡이를 대각선으로 뻗고 그 끝을 조금씩 움직여 장애물들을 감지한다. 딱히 뭐가 없다.
바닥과 마찰하던 지팡이의 끝이 부드러운 천 재질 비슷한 것을 포착한다. 카페 출입구 앞에 깔려 있던 러그다.
'출입구를 발견하셨습니다.'
TV 예능 프로에서나 보던 자막이 떠오를 일이다. 물론 안 보이는 눈으로 30년을 넘게 산 내 입장에서는 별로 특별한 상황이 아니지만...
"아! 저랑 같이 나가시죠."
사장님이 달려온다. 처음 방문하는 곳에서는 거의 대부분 겪는 일이다.
이 경우, 진짜 안내가 필요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지금은 후자다.
카페는 차가 활발하게 다니는 도로에 위치해 있고 인도도 넓게 형성되어 있다.
도로와 인도 사이에 한 번씩 빼곡하게 가꿔져 있곤 하는 화단도 없어서 지팡이로 살살 탐색하면 충분히 인도와 차도 사이의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어, 계단, 조심하셔야 하는데..."
사장님이 문 앞까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카페 입구에 조금 촘촘하게 쌓여 있는 두 칸의 계단과 얕은 경계석을 내려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도움 주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끼리 항상 이러고 잘 다녀요."
보행에 집중하느라 사장님의 존재를 다소 늦게 인식한 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고, 그녀는 살가운 말씨로 거절의 의사조차 유쾌하게 밝혔다.
"그래도 인도 위로 자전거가 많이 다녀서 위험하실 수가 있는데... 혹시 택시 타실 건가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도로 앞까지만 같이 가시죠."
정신없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사람이라고 해도 멀리서부터 흰지팡이를 보게 되면 넉넉하게 피해서 가거나 속도를 줄일 것인데, 그런 지팡이의 마법을 직접 겪을 일이 없는 정안인들 입장에서는 그 불안함을 어찌할 수 없나 보다.
별수 없이 이번에는 카페 사장님의 친절을 감사히 받기로 했다.
차량이 3분 거리까지 왔다는 택시 기사님의 전화를 받고 카페를 나섰음에도 우리는 도로 앞 인도에 서서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저녁 시간이라 시내의 차량 이동량이 많아지면서 길이 막히는 게 원인인 것 같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아닌데,
"차량 번호가 몇 번이라고 하셨죠?"
카페 사장님의 친절이 계속되고 있다.
저 카페에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제발 있었으면 좋겠다.
"3709번인데, 곧 오실 거예요. 제가 지팡이를 들고 있어서 이거 보시고 기사님들이 보통 잘 찾으세요."
한 줌 거짓 없는 진실이다.
우리 같은 중증 시각장애인들은 거주 지역 안에서 이동할 때 주로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기 때문에 택시 기사님들이 이 흰지팡이를 몰라볼 까닭이 없다.
그러니 사장님도 이제는 편히 일터에 복귀하셔서 다른 손님들을 좀 살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카페 망할까 봐 내가 두렵다.
"아, 그렇구나. 그럼 조심히 가시고, 다음에 또 찾아 주세요."
물론 그럴 예정이다.
어디든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한 번씩 정이 많은 사장님들이 계속 우리의 동태를 신경 쓰면서 하나라도 더 도와줄 거 없나 노심초사하지만, 여러 번 얼굴이 익으면 차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나와 그녀는 이렇게 사람들이 우리로 하여금 점점 익어가는 모습을 좋아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기쁜 일이다.
짧은 손인사로 사장님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호출했던 장애인콜택시에 승차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낙곱새다. 나와 그녀는 주량이 비슷하고, 술을 멀리 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주말이면 이런 칼칼한 밥 겸 안주에 소주 한 병씩은 비우는 편이다.
특히나 오늘 가는 곳은 전에 방문한 적 없던 새로운 곳으로, 이래저래 기대가 크다.
아까 머물렀던 카페에서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식당이 있다. 차가 밀리는 시간이니 조금 더 걸리겠지 했는데 도착 시간에 큰 차이가 없다.
카드로 운임을 결제하고 내리는데, 콜택시 기사님이 우리를 안내해 정확히 식당 문 앞까지 인도했다. 이런 부분이 우리가 장애인콜택시를 자주 이용하는 이유가 된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영업용 톤의 활기 있는 목소리가 우리를 맞아주는데 그 안에 약간의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다.
보호자는 없는 것 같고, 두 사람 다 아예 앞을 못 보는 맹인들 같은데, 식당 직원으로서는 이들에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힐 것이다.
괜스레 내 입꼬리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