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치 약속된 것처럼
그 이별은 내가 그녀의 부모님과 우연히 처음 마주치면서부터 어느 정도 예기되었다.
예기라는 단어의 정의가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하여 미리 생각하고 기다림'이라고 한다면, 그 한 번의 이별은 진정 그녀와 나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예기되던 것이 맞다.
물론 그녀 부모님과의 첫 대면에서 어떤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렇듯, 내가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잠시 마주쳤던 것으로, 그 순간에는 서로에게 좋은 인상만 남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잔잔한 파문은 그러고도 몇 달 뒤에 있었다.
"재윤이랑은 언제까지 만나려고 그래?"
상황이 얄궂게도 그녀가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듣고 있던 말을 나도 옆에서 같이 듣게 되었다.
호출한 장콜을 기다리기 위해 대로변에 서 있었을 때, 잠시 드세게 불어든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불편하게 흩뜨리면서 생긴 불운이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기 위해 그녀가 반사적으로 귀에 있던 휴대전화를 떼면서 통화 상태가 스피커폰으로 전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위와 같은 말이 흘러나온 것이 딱 그 순간이었다.
답답한 한숨, 안타까운 탄식, 어쩌면 두려움?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얇게 갈라지며 대충 그 비슷한 감정의 부산물들을 실어 날랐다.
'언제까지 만나려느냐'에서 그 언제가 '오늘 몇 시까지'를 말하는 것일 리 없다.
어떤 사유의 과정도, 근거를 찾는 추론도 거칠 필요 없이 우리는 각자 정해진 답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들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평소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술잔을 기울였다.
그 뒤로도 우리는 몇 달을 더 만났다. 그리고 헤어짐은 어느 날 조용하게 스며 나온 그녀의 자연스러운 한 마디를 신호로 찾아왔다.
"나는, 니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왜 그녀가 갑작스럽게 나에게 이런 말을 해야만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로부터 이틀 전, 나는 그녀의 아버지와 단둘이 술을 마셨다.
상황은 여느 때와 같았다. 나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같이 택시에서 내렸고, 마중 나온 그녀의 부모님과 만났다.
매번 이렇게 마주쳤던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기다리며 밖에 나와 있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나로서도 딱히 불편함을 느낄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먼저 집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나와 계셨던 그녀의 아버지가 나를 불러 세우는 경우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재윤 군. 잠시 시간 좀 있어요?"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 될 때임을 나는 직감했다.
평소와 조금 달라진 미세한 상황 변화, 그 속에서 내가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어떤 판단을 하게 될지 빠르게 촉이 왔다.
'결국 올 게 왔구나.'
밤이라 한참 분주해야 할 텐데도 의외로 한산하고 조용했던 호프집에서 우리는 마주 앉았다.
"우리 은하가 눈을 다쳤을 때, 그것 때문에 이제 평생을 앞도 못 보고 살게 될 거라는 걸 알았을 때, 나랑 은하 엄마는 앞으로 은하 결혼시킬 생각일랑 일절 하지 않기로 했어요.
밖에 내놓는 것도 불안한데 결혼해서 따로 산다고 하면 몸 다칠 것도 걱정이고, 마음 다칠 것도 걱정이고...
재윤 군도 부모님 마음을 안다면 조금은 짐작할 수 있지 싶어.
그런데 우리 생각이랑 다르게 정작 은하는 의지가 보통이 아니더라고.
무슨 학교에 다니겠다, 어디서 교육을 받겠다 하더니 자기가 원하는 곳에 취업을 척척 해내지 않나, 혼자서 밖으로 돌아다니고, 밥이며 빨래며 스스로 착착 해내지를 않나...
도무지 눈이 안 보이는 애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니까.
몇 년을 그렇게 지켜보니까 우리 부부도 생각이 변하더라고.
아, 이렇게 의지가 있고 뭐든 하려고만 하면 해내는 힘이 있는 게 우리 딸이라면 결혼을 시켜도 되겠구나."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그녀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로 가면서 점차 힘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재윤 군도 우리 은하랑 같은 장점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지,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재윤 군이 은하보다 더 굳세고 능력도 있어.
은하가 재윤 군을 만나면서 자신감도 더 높아지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더 많아졌다고 항상 얘기해요.
나는 우리 애가 저렇게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성장하는데, 그걸 이끌어준 사람이 재윤 군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실제로도 그게 맞고."
어차피 결론에 가서는 훈훈한 말로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니 우선 서두에서나마 나를 높여주고 인정해 주겠다. 그런 의도가 적지 않게 짐작이 가는 말들이었다.
"솔직히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둘이 지금보다 젊었더라면 우리 부부도 조금 더 지켜봤을지 모르지.
그런데 이제는 생각을 깊게 해봐야 할 때예요.
둘 다 나이 서른이 넘었으니 슬슬 결혼할 사람 만나야지.
요즘 젊은 사람들, 나이 서른 넘었다고 바로 결혼 생각 안 한다지만, 나는 적어도 우리 은하나 재윤 군처럼 아까운 사람들은 결혼을 조금 서둘러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
눈은 안 보여도 각자 능력 출중하고 인물도 훤한데, 눈 보이고 마음 좋은 사람 만나서 힘들지 않게 잘 살면 얼마나 좋겠어.
우리 딸은 아직 부족하니까 나랑 은하 엄마가 데리고 있으면서 차츰 좋은 사람 찾아봐야겠지만, 재윤 군은 지금 내가 보기에도 너무 훌륭해. 당장 좋은 인연 만날 수 있지 싶어요."
이 대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고개를 깊게 숙여 보이며 정중하게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이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리고, 어떤 점을 염려하시는지도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내가 진정으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다면 이렇듯 나의 말을 할 때 더없이 당당해야 했다.
나는 충분히 단단한 사람이며, 동시에 무모하게 어려움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 신중함도 갖추고 있다고. 그래서 그녀가 나와 함께한다 해도 결코 다치거나 슬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언젠가 오고야 말 이 순간을 위해 나는 그런 말들을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럼 재윤 군은 우리 은하랑 결혼할 생각이 있어요?"
내 구구절절한 말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있은 뒤,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묵직한 한 방이 들어왔다.
단순한 질문이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물음이었으나 내 사고가 여기에서 멈췄다.
당시 그녀와는 1년 조금 넘게 만나고 있던 상태였다.
나와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 누군가는 이 시기에 결혼을 염두에 둘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 않다고 해서 엄청난 문제가 될 건 아니지 않은가?
조금 더 현재에 집중해도 되고, 서로에게 충실하기만 해도 되는, 아직은 그런 때가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지내고 있었다.
"은하랑 결혼 얘기를 해본 적은 있고?"
당연히 없다. 나도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그녀도 결혼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만약에 은하가 재윤 군이랑 당장이라도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재윤 군도 그럴 생각이 있어요?"
어찌 보면 그녀의 아버지는 내 예상보다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무작정 직진하는 마초적인 스타일의 남자였다면 이 대목에서 '당연하죠!'를 외칠 수도 있었을 텐데, 진짜 그랬으면 어쩌려고 이런 질문을 계속하셨을까?
이쯤 되니, 문제는 오히려 나한테 있었다.
의외로 모범적인 답안이 있는 물음이었음에도 나는 그 답안지에 어떤 글자조차 써넣지 못했다.
'여기서 저 혼자 판단하고 아버님께 그렇게 하겠다 안 하겠다를 말씀드리는 건 은하에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와 은하가 정말 깊게 대화하고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말을 못 했다.
"나는, 니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바다가 보이는 한낮의 카페, 겨울바람보다 햇살이 더 많이 느껴지는 한적한 공간,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의 물결을 소리로 느끼며 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우리 아빠가 결혼 얘기 했지?"
내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의외로 소극적이어질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사실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랑 만나면서도 그녀가 먼저 그에 관련된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히 말씀하셨지. 부모님 마음이잖아. 난 충분히 이해해."
내 어깨에 살며시 몸을 의지하고 있던 그녀가 다시 자기중심을 찾아갔다.
그 순간만큼 그녀가 나에게서 조금이지만 확실하게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설마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올 줄은 몰랐다.
그냥 서로 없었던 일 같이, 아니면 은근슬쩍 지나 보내도 되는 일 같이, 잠깐 겪었던 해프닝 같이 조용하게 넘겨 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시간을 더 이어가는 데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 우리도 이제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해 봐야 할 것 같다고? 아니면 부모님 걱정하시는 건 잘 알겠지만 우리 같이 끈기 있게 만나면서 사랑을 증명해 보자고? 그것도 아니면...
모르겠다.
"나도, 니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떤 확실한 결정도 없이, 그저 무슨 대답이든 해야만 할 것 같아서 급하게 뱉은 한 마디가 그 언젠가처럼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받은 선물에서 알맹이만 빼내어 가진 다음 포장지만 고이 접어 돌려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잠깐 동안만, 시간 좀 가질까?"
이 대사가 대부분의 연인들이 헤어지기 전에 최후의 배수진을 치는 멘트라는 건 이제 국제적 상식이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그녀가 이 말을 했을 때, 나에게 어떤 쪽으로든 일말의 확신이 있었다면 그 한 번의 헤어짐조차 우리에게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아무 말하지 못했지만, 눈 안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묵언은 곧 긍정이다. 설사 그것이 미묘한 오해라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