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가을이 오고
"은하 씨랑 얘기하니까 재미있네요. 자주 보고 싶은데 이번 주말에 밥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정확히 요리 강습 6회기째에 내가 그녀에게 건넨 말이었다.
둘 사이의 대화가 한참 고조돼서 서로 박수치고 웃고 뒤집어질 때쯤 자연스럽게 던진 한 마디였으니까 제발 올드하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나도 나름대로 계산하는 남자다.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처음 느낀 때가 요리 수업 2회기째였으니 그 뒤로 4회기, 그러니까 네 번 정도 더 만나면서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6회기 무렵에 위와 같은 제안을 하고 OK 시그널을 받아서 실제로 주말에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면 그 뒤로도 2회기, 싫으나 좋으나 우리가 공식적으로 마주칠 기회가 두 번은 더 남아 있게 된다.
주말에 따로 만나서 점수를 따놓을 수 있다면 남은 2회기 동안 굳히기에 들어가면 되고, 만약 성과가 지지부진했다면 만회를 시도하면 된다. 만회 안 되면 말고...
완전무결한 전략이다. 이제 대답만 들으면 되는데,
"저야 좋죠. 요즘 주말에 심심한데..."
성공했다.
만날 곳이나 먹을 거, 방문할 카페 같은 것들은 전부 내가 추천했고 그녀는 승낙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는 새 직장을 구하면서 아예 고향을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해 온 것이기 때문에 아직 이곳에서 많은 활동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물론 그녀의 부모님도 함께 타지로 옮겨오긴 했으나, 그 무렵이 딱 가족 구성원 모두가 마음 편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시점이었으므로 시간을 내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엄두는 내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대망의 주말이 내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하루가 되었다.
어찌 보면 그녀와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기도 해서 나는 최대한 내가 독립적으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곳들을 골라 배치했다.
같이 얘기 나누고 시간 보내기도 바쁜데 괜한 이슈들로 분위기를 망치거나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이면을 엿보게 된 것은 같이 거리를 걷던 때였다.
밥을 먹고 근처 카페로 가기 위해 이동하던 중이었다.
"횡단보도네요. 지금이 건널 때인지 아닌지 좀 애매하니까 그냥 한 차례 기다리죠."
마침 사람들이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오던 때에 우리가 그 앞에 서게 되었으므로 신호가 바뀌기까지 남은 시간이 몇 초인지 알 수 없어 그냥 한 차례 기다렸다가 건너기로 했다.
"어, 여기에는 음향 신호 유도기가 없나 봐요."
옆에서 계속 삑삑 소리가 나는 비프음이 들리기에 뭔가 했더니 그녀가 한참 음향 신호 유도 리모컨을 누르고 있었다.
이 리모컨을 소지하고 신호등 앞에서 버튼을 누르면 그 리모컨의 신호와 호환되는 유도기가 작동해 길을 건너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안내해 준다.
문제는 이 유도기가 모든 신호등에 다 설치돼 있지 않다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서 있던 그 신호등에 유도기가 없었다.
"아, 여기에는 유도기가 없어요. 저도 자주 다니는 곳이라 설치해 달라고 구청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때를 놓쳤네요.
지금 민원 접수해도 시일이 제법 걸릴 거예요."
보편적인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요청하는데 무슨 때가 따로 있느냐 하겠지만 의외로 그런 부분이 있다.
아무래도 연초에 예산이 한참 널널할 때 이런 요청을 하면 신호 유도기 설치가 빨리 되는 편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초가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나 역시도 신속한 민원 처리를 기대하지 않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럼 사람들이 건너는 소리라도 듣고 움직여야겠네요."
"그래도 되긴 한데, 다른 방법도 있어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신호등 근처를 보면, 좌우로 도로가 있고, 우리 왼쪽에도 앞뒤로 도로가 하나 더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왼쪽에는 두 개의 도로가 십자 형태로 교차돼 있는 거죠.
이때, 우리가 건너야 하는 신호가 되면, 왼쪽에 있는 도로에서도 차들이 우르르 출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정확히 우리 기준으로 일곱 시 방향에서 열 시 방향을 향해 차들이 몰려가요."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의 도로들 중 8할에서 9할은 이 법칙의 적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안정성은 음향 신호 유도기의 안내를 받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 지금 건너면 되는 거 아닌가요? 빨리 가요. 신호 바뀌기 전에..."
내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확히 우리의 일곱 시 방향에서부터 차들이 줄지어 몰려가는 소리가 잡혔다.
그녀도 딱 맞게 파악했는지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우선 손부터 들어요. 그리고 지팡이를 보행 준비 자세로 뻗어서 이동할 준비를 해요. 이제 1초만 세고 건널게요."
이건 내가 위와 같은 방법으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이런저런 상황들을 겪으면서 터득한 개인적인 노하우다.
손 먼저 들고 길 건너길 잘했지, 아니나 다를까 두어 걸음 앞으로 나가자 지팡이 끝에 탄력 있는 자동차 바퀴가 걸렸다.
아마 좌측에 수직으로 뻗어 있던 도로에서 우리가 건너려는 교차된 도로로 커브를 돌아 들어오던 차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이 차는 전기차인지 엔진 소리마저 워낙 조용해서 우리 앞으로 꺾어 들어오는 걸 나조차도 소리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숨겨진 노하우가 있는지 몰랐어요. 재윤 씨 말대로 따라 하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위험할 뻔했네요."
길을 다 건너자, 그녀가 잠시 멈춰 서더니 나에게 한 말이었다.
딱히 특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늘 그렇듯 가던 길 갔을 뿐인데 이게 그렇게 놀라울 일인가 싶었다.
"은하 씨도 여기저기 혼자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 익히게 되실 텐데요 뭘."
하지만 그녀는 나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보조 장비나 휴대전화 앱을 사용해서 생활하는 것만 배웠지 이런 실전 팁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아직도 배울 게 많구나!"
당연히 처음에는 다 그렇다.
일단 장비가 됐든 휴대전화 보조 애플리케이션이 됐든 완벽하게 익혀서 내 생활에 녹일 수 있어야 그다음 순서로 자기만의 생활 노하우라는 게 생긴다.
실명한 지 7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 터득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녀는 7년간 재활에만 힘쓴 게 아니라 자기만의 인생을 다시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에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 역시도 그녀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실명이라는 불행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젊은 나이에 그 어둠을 초연하게 품고, 바로 쉼 없이 달려 이 세상에 자기 자리를 마련한 그녀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그녀의 의지에 감탄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나에게 있어서는 일상의 장애물조차 되지 않았던 신호등을 등 뒤에 두고 당황하며 위험을 걱정하던 그녀를 보았을 때, 느닷없이 떨려오던 내 가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빛나는 사람한테도 나라는 보잘것없는 남자가 필요할 수 있겠구나.'
단순히 그녀가 발산하는 매력에 가벼운 호감 정도 느끼고 있었던 나였다.
그러나 길 위에 서서 땀에 젖은 손으로 내 팔을 붙잡는 한 여자에게 내가 도움이 되고, 필요가 되고, 기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를 그토록 가치로운 존재로 발돋움시켜 줄 그녀를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꼭 누군가의 필요가 되고, 기쁨이 되기 위해 애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고, 성장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점차 맡게 되는 역할과 책임이 생기기 마련인데, 단지 거기에 충실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할 몫은 다 하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유독 그녀에게 충실해지는 나를 상상할 때에만 그토록 설레고 벅찼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우리, 만나 보는 거 어때요?"
마지막 8회기째 요리 강습이 끝나고도 우리는 각자가 한가로운 주말에 다시 만났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서 이 말을 들었다.
그 언젠가처럼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다 건넌 뒤, 그늘을 넓게 드리운 가로수 아래에서였다.
기존의 완전무결했던 계획에 따르면 이 말을 먼저 건넬 사람은 나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 있은 뒤로 몇 번을 더 그녀와 대면해도 이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였다.
그녀를 대하는 나의 감정이 남들을 대할 때와 다름을, 이를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녀도 나와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내가 그렇듯 사랑하고 있음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장으로 내보여야 할지 한참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갑작스럽게, 가벼우면서도 간질간질하게,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니...
"그래도, 돼요?"
다시 생각해도 멍청해서 죽고 싶다. 하고 많은 대답들 중에 저게 뭔가?
하지만, 이다지도 한심한 나의 반문을 듣고도 그녀는 당황하거나 토라지지 않았다.
할 일 없이 그냥 놀고 있던 내 왼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그저 작게 웃었다. 세련된 승낙이었다.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풍성하게 늘어져 있던 플라타너스 나뭇잎들이 저들끼리 부대끼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가을바람이 보내는 박수를 받으며 우리는 손 잡은 채 다시 거리를 걸었다.
그 해 가을에 만남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겨울에는 이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