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가 된 것 같았다
백치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손을 어떻게 쓰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백스페이스는 너무도 쉽게 글자를 지웠다. 글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적어도 펜을 쓰던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글자 하나하나에 내 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힘들여 썼건만 잔뜩 망쳐버린 논술 시험이 떠올랐다. 회색 갱지에는 내가 적어놓은 까만 글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글을 지운 자국이 많았다. 종이는 혼란스러웠던 시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쉽게 쓰이고 쉽게 지워졌다. 그것은 미덕이기도 했다. 디지털화된 문서는 활자를 검색하기도 용이하고 글을 깔끔하게 편집하기에도 좋다. 스마트폰 초기 시절, 카카오톡 데이터만으로도 벌벌 떨던 후배에게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 야, 그걸로 소설을 써도 1메가도 안 나올거다.
글자는 바이트였고, 텍스트는 한껏 모아봐야 킬로바이트였다. 그러나 훅 날아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간혹 사이버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오가는 수치는 모두 모니터에 비추어져 있었다. 엑셀은 계산하고 파워포인트는 적었고 워드는 공포했다. 사람들은 비즈니스를 했지만 실제로 돈을 만지는 사람은 전산시스템이었다. 이러다 회계처리가 잘못 되어서 돈이 안개처럼 상계되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불을 껐다. 이불 감촉이 생소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바람이 기도를 통해 들락였다. 밤공기가 아직 차가웠다. 부드러운 이불의 촉감과 더불어, 이제는 이불이 담아둔 내 체온이 내게로 다시 느껴졌다.
이불을 끌어올리려 살짝 쥐었으나, 손가락 사이로 천이 비져나와 만족스럽게 잡히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이걸 제대로 잡을 수 있지.
나는 이불을 잡던 것을 잊고 손을 놀려보았다.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손가락을 희미하게 보았다. 왜 손을 움직이고 있지. 그래, 배우면, 손을 알맞게 움직이는 법도 있을테니 그 방법을 배워서 익히면, 연습하면. 내가 지금 놀리는 손짓을 지워서, 그 위에 올바른 손놀림을 입히는거야.
나는 멀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