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주 6일
이번주로 나는 29주차 임산부가 되었다. 30~32주차부터는 해외로 여행 다니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 전에 해외여행을 마지막으로 다녀오기로 했다. 자궁경부 길이가 2.5cm도 안 되어서 조산 위험이 있다며 의사 선생님께서는 우려를 나타내셨지만, 미리 끊어 놓은 비행기 티켓과 숙소며 식당 등 각종 예약들을 모조리 취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이번 여행은 절대 무리하지 말고 중간중간 카페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다니자고 남편과 얘기한 끝에 비행기에 올랐다.
28주차 말쯤에 오사카로 출발해서, 3박 4일을 지내고 돌아오니 29주차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2일차에 발생했다.
2일차에는 오사카에서 1시간 거리인 교토로 당일치기를 다녀오기로 했다. 그러나 오사카에서 가까우니 날씨도 비슷하겠지 싶어서 가벼운 차림으로 떠난 것이 화근이었다. 그 날 교토는 오사카보다 기온이 3~4도나 더 낮았고, 덕분에 아침부터 살짝 간질거리던 목이 저녁 무렵이 되자 감기로 번졌다.
호텔로 돌아와서 좀 쉬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가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졌다. 3일차 밤에는 완전히 몸살 감기에 코가 막히고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푹푹 찌는 듯이 온몸이 아팠다. 1리터짜리 보리차를 편의점에서 사다가 밤새 마시고 다음 날에도 틈틈이 마셨다.
그런 와중에도 약을 쓸 수가 없어서 더 고통스러웠다. 예전 같았으면 약국에 들러서 감기약을 사 먹었을 텐데, 임산부는 약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들었다. 다행히 남편이 캐리어에 챙겨 온 타이레놀이 있어서, 정 안되겠다 싶을 때 한 알씩 먹었다.
그것도 인터넷에서 ‘임산부 타이레놀’ 하는 식으로 검색해서, 정말 먹어도 괜찮을지 여러 번 확인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먹었다. 또 자궁경부 길이가 짧아서 (2.4cm) 따로 먹는 심혈관계 약이 있었는데, 같이 먹어도 되는지 긴가민가해서 혼란스러웠다.
임산부가 열이 나면 태아한테 안 좋다는 이야기, 타이레놀은 임산부가 먹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약을 복용하는 상황에서 타이레놀을 먹어도 되는지, 먹는다면 하루에 몇 알을, 얼마 간격으로 먹으면 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게다가 타이레놀은 해열 진통 효과만 있었지, 기침이나 가래, 염증을 가라앉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귀 안쪽이 부어서 꽉 막히는 탓에 아프기도 했고, 잘 모르는 나조차도 왠지 기침은 그렇잖아도 짧아진 자궁경부에 더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에서 귤을 사다 먹고, 전기 포트로 물을 끓이거나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다 수건을 걸쳐 놓았다. 민간요법밖에는 기댈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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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감기몸살을 기념품으로 가져온 후.
회사에 가서도 기침이 멎질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무실 한 층 전체가 병동이 된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한국에서 병균(혹은 바이러스?)을 붙이고 일본에 가서 발현이 되었던 게 틀림 없었다.
집에 와서도 기침이 계속되었다. 밤이 되어서도 끊이질 않았다. 1시간에 몇 번이 아니라, 1분에 몇 번씩 기침을 해대니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백일해 예방접종을 맞았는데 아예 백일해에 걸려버린 걸까?’
‘이대로면 잠을 어떻게 자지? 30분이라도 기침이 멎어야 잠을 잘 텐데.’
그래도 어쨌든 불을 끄고 눈을 감고 강제로 누워 있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일찍 호텔로 와서 잠이 오지 않을 때 일단은 누워 있었고, 할 일이 없으니 책을 읽곤 했다. <비올레트, 묘지지기>라는 프랑스 소설과 <늑대와 향신료>라는 일본 라이트 노벨을 번갈아서 읽었다. 그런데 소설 읽기도 에너지를 소모했는지, 그 때문에 오히려 올 잠도 쫓아내지고 잘 때도 소설 속 이야기가 머릿속을 뱅뱅 돌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던 생각을 떠올리며 일단 누워서 강제로 잠을 청했다. 코는 막히지, 기침은 계속 나오지……. 그나마 호텔과는 다르게 집에는 믿음직한 가습기도 있고, 가볍고 익숙한 이불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새벽 서너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싶었다. 한 숨도 못 잘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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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예약한 검진 일정대로, 일본에 다녀오고 돌아온 수요일에는 산부인과를 갔다.
자궁경부 길이는 지난번에는 2.4~2.7cm였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1.8cm부터 시작해서 깜짝 놀랐다.
“측정 시작할 때는 수축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조금 있어 볼게요.”
결국에는 2.0~2.7cm 정도로 잡혔다. 그래도 2.5cm 아래면 조산의 위험이 20% 정도 있다고 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태아 무게는 벌써 1kg을 돌파했는데, 겨우 엄지손톱 크기만 한 두께의 막으로 견뎌내야 한다니. 게다가 예상대로 기침은 자궁경부 길이에 정말 안 좋다는 말씀을 하셨다. 열이 있으면 태아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도.
임산부가 먹어도 되는 감기약들과 타이레놀을 처방 받았다. 인터넷에서 익히 들어본 ‘코푸시럽’도 껴들어가 있었다. 거의 소아과 수준의 아주 약한 약들이겠지만,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내 상태에 대해 제대로 진찰을 받고, 적절한 약을 처방 받고, 식이요법과 생활 가이드도 안내 받았다. 배즙이든 귤이든 기침에 좋은 것은 다 먹고, 물도 많이 마시고, 무조건 누워서 지내야 한다고.
사무실에 출근하면 회사 사람들이 오며가며 “몸은 좀 어때?”, “검진에서는 별 말 없으셨어요?” 하고 물어왔다. 그런 안부인사에 자질구레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도 뭣해서, “계속 누워 있으라고 하시더라구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냥 휴식을 많이 취해야 한다는 뜻으로 아셨겠지?
진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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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틈날 때마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뒤져봤다. ‘눕눕’은 진짜로 많이들 처방 받는 생활 가이드였다. 어떤 사람은 18~20주에 벌써 1cm가 되어 버려서 입원을 했다고 했다. 평소처럼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갔을 뿐인데, 배가 살살 아프다거나 뭉친다는 얘기를 해서 수축 검사를 받았더니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당하고 곧장 입원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입원도 하루이틀 하고 끝이 아니었다. 짧게는 1~2주, 길게는 7주간 입원한 사람도 있었다. 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집안일이 눈에 들어와서 이래저래 움직이게 되고, 특히 이미 첫째가 있다거나 하는 사람들은 더 움직일 수밖에 없어서 입원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케이스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양반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입원해서 누워만 지내면 편하고 좋지 않아?’라는 얘기를 주위에서 흔히 했다는데,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나중에는 사람이 우울해지고 갑갑해지는 모양이었다. 입원해 있다가 차도가 생겨서 집에 돌아왔더니, 똑같이 눕눕 생활을 한대도 너무 좋았더라는 얘기도 심심찮게 있었다.
‘맥수술’이라고 하는 ‘맥도널드 수술’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궁경부가 더 벌어지지 않게끔 아예 실로 묶어버리는 수술이라고 한다. 임신 후기가 되면 몸이 출산 준비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따로 하지 않기도 하지만, 중기나 초기에 자궁경부 상태가 위험하면 수술로 묶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20주차 쯤부터 맥 수술을 받고, 입원해서 강제로 누워 지내기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상황이 심각하면 샤워도 일주일에 한 번 주삿바늘을 바꿀 때 휘리릭 해야 하고, 대변조차 누워서 봐야 하는 불상사도 생긴다고 한다. ‘정말 그 정도라고……?’ 싶은 생각마저 드는 얘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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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처방 받은 생활 가이드에 따라 눕눕만 하려니 괴로웠다. 밥 먹고 화장실 갈 때 빼고는 거의 누워 있으라는 식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래도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도는 경험담들에 비하면 한참 양반이 아닌가 싶어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아보려고 했다. 집에서 누워 있는 정도로 커버가 가능할 때 얌전히 누워 지내야지, 괜히 일을 키워서 입원까지 하며 병원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그냥 내가 아파서 수술하고 끝이면 모르겠지만, 자칫 잘못해서 너무 이르게 양수가 터진다거나 해서 아이가 신생아 중환자실(NICU)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때의 불안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그래도 최소 31주는 넘기고 태어나야 니큐에서 어찌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제 막 30주차에 접어드는 시점이니 한참은 더 남은 기분에 암담했다.
밥 먹고 바로 눕는 일을 정말 싫어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그래야만 한다니 난감했다.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싫고, 밥 먹은 채로 누워서 음식이 그대로 몸에 축적되는 기분도 싫고, 역류성 식도염이 슬슬 올라오는 듯한 기분도 싫어했다.
게다가 식후마다 감기약을 먹었더니 눕자마자 10분이면 잠이 들었다. 4가지 약 중에서 2가지에 ‘운전 유의하세요’가 적혀 있었다. 회사에서는 머릿속이 뿌얘지고 동작이 굼뜨는 기분이 들었고,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었는데. 사정이 이렇게 되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다. 글을 쓴다면 ‘그게 건강을 불사하면서 할 만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산부가 눕눕 때문에 누워만 지내면 혈전이 생긴다는 말이 신경 쓰여서 한 가지 자세로 누워있을 수도 없는데, 돌아눕고 또 돌아눕고 하다 보면 화면을 보면서 타이핑을 할 방법조차 없었다.
집안일도 못 하니 여기저기 엉망인 채로 놔두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남편한테 이것 치워달라 저것 정리해 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잖아도 식사 준비부터 온갖 가사를 남편이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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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잘만 3~4cm 길이로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나는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자유도 없어지고, 걱정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는지 억울했다.
내가 생각했던 임신 후기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다른 회사 동료들 얘기를 들어보면 막판까지 국내여행도 여기저기 다니고 (물론 그 친구는 20대여서 달랐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영화관이나 카페도 다니면서 마지막 혼자만의 시간을 잘 지냈다고 했다. 반면에 나는 ‘아기빨래’조차도 엄두를 못 내고 누워만 지낸다니.
반항심 같은 게 생겨서, 오후 5시 반에 깨어서 8시까지 식탁 앞에 앉아 일기를 썼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면, 연휴에 아픈 덕분에 이틀을 내리 잠을 자더라도 하루가 더 남아 있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연휴를 이렇게 날리다니!’라며 속상해 했을 텐데, 이것도 참 신기하다. 어쩌면 휴직 예정자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지금은 앞뒤 안 가리고 일단 건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깨어서 돌아다니는 시간을 온통 출퇴근에 탈탈 털어서 내어주고, 나머지 시간은 통나무처럼 누워서만 지내야 한다니. 아쉽고 억울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