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 6일
# 사건의 발단 - 임산부와 운동
예전에는 임산부라고 하면 항상 누워 있거나 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유튜브 영상만 봐도, 임산부가 돌아다니거나 운동을 적당히 하는 편을 훨씬 추천하는 추세였다. 너무 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면 임산부에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조언에 힘입어서, “나는 건강하게 운동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잘 다니는 씩씩한 임신 생활을 해야지”라고 임신 초기부터 다짐을 했다.
# 스텝퍼
먼저, 어떤 운동을 할 수 있을지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15 분이지만 요가를 하기로 했다. 그것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초심자 버전으로 15분 동안만 적당히 했다. 덕분에 어느 정도 근력운동이나 스트레칭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왠지 운동이 부족한 것 같아서 검색을 좀 더 해봤다.. 찾아보니까 임산부에게 걷기 운동이 매우 좋다는 뉴스와 블로그글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당시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바깥 산책을 하기에는 너무 추웠다.
대신에 집에서 스텝퍼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 사례들이 있는지 검색해 봤다. 의외로 많은 임산부들이 임신 기간에 스텝퍼를 하면서 운동 효과를 봤다며 올린 블로그 포스팅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서 스텝퍼를 며칠 밟아 봤다. 그런데 사흘째가 되는 날 배가 사르르 하고 아팠다. 역시 뭐든 사람 바이 사람인 건가……?
아무래도 이건 이상하다 싶어서 바로 중단했고, 산부인과에 정기검진을 갔을 때 경부 길이를 재 달라고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 “경부 길이가 짧아요”
배 초음파로는 경부 길이를 재기 어려웠기 때문에 질 초음파를 사용하셨다. 그런데 2.5cm 이하인 2.4cm 정도가 나왔다.
그때가 아마 25 주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시기에서 2.5cm 이하면 20%의 확률로 조산이 될 수 있다”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굉장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씀 하셨다. “네? 스텝퍼요? 누가 그런……. 스텝퍼는 당장 중지하시구요…….”라는 말과 함께.
정말로 무리한 운동 때문에 경부 길이가 짧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의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 약 처방과 생활 가이드
나는 바로 약물 처방을 받았다. 하루에 두번 내지 세번 빨간색 알약을 한 알씩 먹어야 했다. 자기 전에는 질정을 투여해야 했다.
내 기억상으로는, 빨간색 약은 심혈관 약으로 혈류의 흐름을 느슨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카페인의 각성효과와 반대 라고 생각하면 쉬웠다. 질정은 하얀색 알약이었는데, 경부가 끈적끈적하게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최대한 집에서 누워 있어야 한다는 생활 가이드를 받았다. 자궁경부가 자궁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으므로, 몸을 눕혀 놓아야 중력을 덜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출퇴근을 하느라 100% 지키기는 어려운 생활 가이드였지만, 그래도 집에 오기만하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샤워 하는 시간만 빼고 다 누워 있었다. 그 덕분이었는지 일주일 후에는 2.4cm가 유지 되고 있었다.
하지만 몇 주 후에는, 일주일에 0.5cm씩 짧아지는 기염을 토해 버렸다. 역시 인생은 방심하면 안 된다.
그 결과 12월 29일 금요일정기검진 날, “회사는 더 이상 나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소견을 받았다.
그날 쟀던 경부 길이는 1cm가 되어버린 상태였고, 여차하면 대학병원으로 입원이 필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수액 맞고 눕눕하기
12월 31일, 일요일인 오늘.
원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에 건대 병원에 가서 차트 아이디라도 만들어 두려고 했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진료 의뢰서를 받아왔었다.
그런데 30일부터 1월 1일까지는 연휴라서 대학병원도 외래진료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일요일인 오늘, 원래 다니던 SC제일산부인과의 대표 원장님을 뵙고 진료를 받게 되었다.
오늘 잰 경부 길이는 1.7cm였다. 그저께만해도 1.5cm가 최대였는데 0.2cm나 늘어났다는 생각에 그나마 기분이 괜찮아졌다. 어쨌든 적어도 줄어들지는 않았으니까. 정말로 누워있는 생활이 도움이 되었던 걸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얘기하면 분명 방심하면 안 된다며 원장 선생님께 혼이 날 것 같았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소독을 해 주시고, 균 검사를 위한 채취까지 알아서 끝내 주셨다. 최근에 <레슨 인 케미스트리>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그 소설에 등장하던 남자 산부인과 의사가 괜히 생각났다. 하지만 이 또한 굳이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소설 속 의사는 여자의 성기를 하도 많이 봐서인지 조금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수축 검사
그저께도 수축 검사를 진행하긴 했지만 오늘도 30분 정도 수축 검사를 다시 하기로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 오늘은 10분 마다 수축이 보인다고 하셨다.
참고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블로그를 보면 ‘수축이 잡힌다’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자궁 수축이 발견될 때도 ‘잡힌다’고 표현하고, 반대로 자궁 수축이 사라져도 ‘잡힌다’라고 표현했다. ‘학원을 끊는다’라는 표현과 비슷하게 굉장히 헷갈리지만 문맥에 따라서 알아서 파악해야 한다…….
어쨌든 오늘은 수축이 보였으므로 일단 수액을 맞아 보기로 했다. 사전에 인터넷에서 알아보기로는, 수액을 맞는 것만으로도 수축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볼 때가 있다고 들었다.
# 수액
몸에 수분이 부족했을 때 나오는 호르몬은 자궁 수축을 유발하는 호르몬과 비슷하다고 한다. 물론 그것도 어떤 블로거가 의사 선생님을 통해 들은 내용을 기억을 되살려 적은 것이니까, 내가 읽은 내용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비타민처럼 생긴 수액을 45분 정도 맞았다. 차가운 수액 한 봉지가 몸으로 들어가서 그런지, 링겔 바늘이 꽂혀 있는 왼팔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몸 전체가 추워졌다.
그래도 수액을 맞았더니 신기하게도 수축이 없어졌다. 아무래도 모름지기 사람은 물을 많이 마셔야 하나 보다. 감기에 걸려도 물 많이 마셔야 하고, 변비에 걸려도 물 많이 마셔야 하고, 심지어 자궁 수축을 잡는 데에도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니.
원장 선생님께서는 이대로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되 입원은 하지 않고 일주일 후에 다시 보자고 말씀 주셨다. 보통 지금 무렵에는 2주에 한 번 정도 정기 검진을 받는데, 그걸 생각하면 나는 비교적 더 자주 산부인과를 찾게 되는 셈이다.
# 진리의 사람 바이 사람
나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내려고 마음을 먹었다.
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에 운동을 안하는 편도 아니었고 몸이 특별히 허약 하지도 않았거니와, 노산이라고 하는 35세 이상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에 비추어 볼 때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임신성 당뇨와 자궁경부 길이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기도 했다. 당뇨에 걸리면 걸어다니거나 운동을 해야 하는데 자궁경부 길이가 짧으면 걷지도 못 하니 난감한 상황이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인슐린 주사 같은 것에 의존해야 한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더 찾아봤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31주에 아이를 낳았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28주에 아이를 낳았다고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인큐베이터 생활을 하게 되어서 마음이 무척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튼 불행이든 행운이든 나만 예외적으로 쏙쏙 피해 가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화성에서 살아남기
예전에 봤던 <마션>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화성에 불시착하게 된 우주인의 이야기였다. 기지의 문짝이 떨어져 나갔던가 해서, 문짝이 있던 자리에 테이프로 비닐을 붙여두는 식으로 임시 문을 만드는 장면이 있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정도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가끔 화성에 폭풍 같은 게 불 때는 비닐이 펄럭거리면서 위태로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주인공은 애써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감자밭을 일구는 등 일상에 몰두했지만, 폭풍에 비닐이 펄럭이는 소리가 날 때는 노래를 멈추고 눈을 감은 채 긴장했다. 마치 나의 짧아진 자궁경부가 그 비닐 쪼가리 문짝 같고, 자궁 수축이 느껴질 때면 화성에 폭풍이 치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그래도 뭐 어쩌겠나.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지.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고 후회를 해서 후회할 일이 없어지면, 걱정도 후회도 할 일이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