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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커피

뒤나삼대 프로젝트 01

by 구의동 에밀리

“과테말라로 할래?”


“나 과테말라가 뭔지 모르는데.”


그가 커피를 추천해줬지만 나는 전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그냥 과테말라로 할래.”


에스프레소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에만 있다는 블랙이글 머신이었다. 위이잉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앞에 놓인 종이를 봤다.


종이에는 커피 생산지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지도도 있었고 글도 있었다. ‘풍부한 산미가 가미된’ 이런 글귀들인데, 보면서도 뭔 소린지 잘 몰랐다.


사진을 봤다. 커피콩을 키우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특이한 일은 없었다.


움직인다?


사진이 움직였다. 아니, 내가 잘못 본...? 분명히, 바구니를 머리에 인 흑인 여자가 기우뚱했다.


다시 보니 사진은 멈춰 있었다.


슬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잽싸게 사진을 봤다. 아까 그 방향으로 다시 기우뚱했다. 커피콩 같은 게 조금씩 쏟아지려고 했고, 여자는 ‘어어어’ 하는 표정으로 기울어진 포즈였다. 뭔 생각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사람이 위태로워 보여서 손가락으로 커피콩 바구니를 잡아 주었다.


바구니가 제자리를 잡았다.


이건 무슨...?


나는 3D 세계에 살고 있는데, 종이를 이렇게 누른다고만 해서 바구니를 잡을 수도 있다니. 무슨 원리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바로잡힌 바구니를 양손으로 이고선 고맙다는 눈길로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동상처럼 멈췄다.


멈추는 게 더 이상하다니... 사진인데...


“주문하신 아이스 라떼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아, 예.”


나는 ‘어 형님, 제가 들고 갈게요’라고 트레이를 잡았다. 트레이 위에 아까 봤던 리플렛을 얹어 오는것도 잊지 않았다.


푹신한 소파 자리로 가서 커피를 놓았다.


“형님 이거 보세요.”


소파에 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여 리플렛을 보여주었다.


“이게, 여기 밑에 있는 사진이요,”


‘아까 이 여자가 움직였어요’라고 말할까? 나는 내가 너무 이상한 얘기를 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질 까봐 일단 말을 멈췄다. 그럼 좀 떠보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거 사진 이상하지 않...”


“어어!”


그는 갑자기 엉덩이를 살짝 떼면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리플렛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됐다.”


“...? 뭐가 됐...?”


그 시각, 지구 반대편 과테말라에서는 커피를 키우는 사람들이 분주했다. 커피콩 수확은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평소보다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확을 위해 일용 노동자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물론 손놀림은 기존에 일을 계속 해오던 사람들에 비하면 어눌한 편이었지만, 이 지역에서는 이맘때 정기적으로 일용직을 뽑으므로 해마다 비슷한 사람들이 다시 와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이, 바구니 안 쏟게 조심하라구.”


‘꽉꽉 채워서 옮겨야 빨리 할 수 있다고 다그치더니, 그렇게 채우면 잘 쏟아지는데 뭘 어쩌란 거야.’ 그는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며 치맛자락을 끌러 바닥에 바구니 놓을 자리를 확보했다. 이제 조금만 더 담으면 또 한 통이 채워졌다.


“쏟는 건 맘대로 하는데, 한 톨도 남김없이 주워 담아야 하니까 알아서들 해.”


그는 커피콩을 몇 번 훑은 다음, 가득 담긴 바구니를 머리 위에 얹었다. 조심조심 일어나 걸어가는데, 서툰 걸음 때문에 마치 하나하나가 정지화면인 것처럼 보였다.


“어!”


바구니가 살짝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 ‘살짝’에 ‘에이 뭐’라고 방심했는데, 커피콩을 가득 담은 바구니는 무게 때문에 급속도로 기울 기세였고, 콩이 한두 톨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쫙 났다.


‘한 톨도 남김없이 주워담아야 하니까 알아서들 해!’


‘이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로 어떻게 저걸 줍지?’


눈앞이 하얗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옆에서 바구니를 원상태로 밀어주었다.


“감사합니...”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가 눈만 겨우 돌려서 주위를 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알 수 없는 사람인지 신인지에 대해 벙찐 감사를 표했다.


그는 그 다음에도 또 커피콩을 쏟을 뻔했고, 이번에는 땅이 흔들린 듯이 갑자기 어지러우면서 바구니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까와는 달리, 마침 옆에 같이 걷던 일꾼이 있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 방금 뭔가 어지럽지 않았어?”


“왜, 너 어지러워?”


“아니, 방금 땅이 좀 기운 것 같아서...”


“머리에 너무 무거운 걸 얹으면 어지러울 때도 있어. 오늘처음이지?”


“그렇긴 한데...”


“야, 저기 봐봐.사진 찍으러 왔다.”


펑!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서 그의 모습은 옆에 있던 동료와 함께 사진에 담겼고, 한 달 뒤 인쇄물로 나와서 광화문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에 놓이게 되었다.


어떻게 한 달이라는 간격을 넘어서 커피의 소비자와 생산자가 한날 한시에 만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 그 때 나와 커피를 마셨던 형님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와, 과테말라의 맛이 그 먼 거리를 날아와서 커피 한 잔에 담겨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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