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 ~제로X제로~

0과 1의 애프터라이프

by 구의동 에밀리

고도로 발달한 AI 세계는 현실과 구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만큼 이 게임, ~제로X제로~는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너무도 뻔한 RPG 게임이었다. 심지어 그래픽은 도트로 구현되어서, 언뜻 보면 2000년대에 나온 CD-ROM 게임으로 오인될 여지마저 있었다.

제작사는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그래픽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라며 게임을 홍보했다. 자체적으로 AI 연구소까지 운영하고 있다며 대대적으로 어필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빈말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몸소 플레이한 입장에서도 수긍이 가는 주장이었다.

듣자하니 원래 ~제로X제로~는, 기성 MMORPG들에서 NPC들이 맡던 역할을 플레이어들이 직접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과연 실험적인 도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한 자리에 주구장창 머물면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NPC 역할을 하고 싶어할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다. 그 탓에 플레이어들이 죄다 ‘탱딜힐’의 필드 쪽으로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베타 테스트는 흐지부지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베타 테스터로 참가한 진성 플레이어들만 알음알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제작사가 콘솔 위주의 북미와 유럽 시장으로 타겟을 넓히면서 솔로 플레이 RPG로 노선을 변경했다고들 알고 있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RPG들과는 다르게, NPC들에 인공지능을 탑재하고 플레이어와 서로 양방향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구성했다는 것이 제작사가 강조하는 게임의 특징이었다.

“또 AI 타령이야?”

그것이 내가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에게 던진 첫 반응이었다. 그는 ~제로X제로~의 베타 테스터로 참여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딱히 비밀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소수만이 알고 있던 제작 배경에 대해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타령은 무슨. 이제는 AI가 안 적용되는 분야를 찾기가 더 힘든 세상이야.”

“아니, 그건 너무 이과스러운 말 아니야?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알아서 통역을 해 줄 테니까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는 둥, 그런 얘기가 나온 지가 언젠데. 그래도 여전히 통번역사는 필요한 걸.”

“그거야말로 다분히 문과적인 시대감각인걸? 이미 몇 년 전에도 배그에서 AI가 대신 전투하고 그랬잖아.”

“뭐? AI가?”

한동안 열심히 치킨을 노리며 <배틀그라운드>에 열중했던 나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몰랐어? 새벽이나 이럴 때는 플레이어가 별로 없으니까, 플레이어인 척 하는 AI 캐릭터들을 집어넣고 그랬잖아. 일부러 봇전 도는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세에상에! 그럼 그 동안 내 치킨을 빼앗아 간 놈들 중에 AI가 있었을 수도 있는 거야?”

아무튼 그 이야기를 듣자 ‘편견을 깰 필요가 좀 있겠다’ 싶어졌고, 곧장 ~제로X제로~ 게임에 계정을 하나 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줄리엣을 만났다.

(다음 화에 계속)


* 배경사진: Unsplash의 Tatiana Zhukova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카지노의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