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의 애프터라이프
줄리엣을 만난 것은 게임을 어느 정도 진행한 후의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과연 ~제로X제로~는 굉장히 평화로운 게임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하다. 단순히 내가 평화주의자처럼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제로X제로~를 시작할 당시, 나는 FPS 게임을 몇 년간 줄창 하면서 질려버린 차였기에 뭔가 느긋하게 힐링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이 세계에서만큼은 필드에 나가기가 싫었고, 마침 연금술 스킬들을 획득할 수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 이것저것 주워 배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연금술 공방을 차리는 데까지 캐릭터를 키웠으니, 직업을 선택한 적은 없어도 나는 연금술사 캐릭을 하나 키우고 있는 셈이었다. 이름도 ‘불광동불주먹’ 같은 폭력적인(?) 닉네임 대신에 평범하게 ‘캐서린’으로 지었다. 나의 ~제로X제로~ 세상에서는 폭력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지금껏 가보지 않았던 작은 도서관 하나를 발견했다. 도서관이라면 책이 많은 공간이고, 책이 많다면 연금술 두루마리도 한두 개 구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연금술사로서는 꼭 털어야 하는 장소였다. 분명 시작 마을은 다 둘러봤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나 보다.
도서관에는 사서가 머리 위에 ‘줄리엣’이라는 이름표를 띄우며 카운터에 앉아 았었다.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이 마치 로맨스 판타지에 자주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직속 시녀 1’ 같은 외양이었다.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면서 연금술 두루마리 세 개를 찾아냈다. 이런 작은 도서관에서 두루마리 세 개면 나름 괜찮은 수확이지만, 어쩐지 사서 NPC로부터 뭔가를 더 얻어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걸었다.
“안녕? 난 줄리엣이야.”
대뜸 반말을 사서라니. 이런 NPC는 또 신선했다. 보통은 “어서오세요”라든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로 답하던데.
“안녕, 난 캐서린이야. 이 도서관에서 연금술 두루마리를 세 개 찾았는데. 혹시 더 있을까?”
나는 입력창에 열심히 멘트를 적고 엔터를 쳤다. 요즘 같은 세상이면 음성인식으로 구현할 수도 있을 텐데, NPC들은 AI로 열심히 만들었으면서 대화는 텍스트로 한다는 게 한편으로는 아날로그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내가 아는 한, 세 개가 전부야.”
단순한 대답. 그에 나는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그렇구나. 혹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연금술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희귀해서 그런지 두루마리를 도저히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모르겠어서. 아니면 애초에 그런 두루마리는 없으려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두루마리라…….”
줄리엣은 한동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죽기라도 하려고?”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잖아? 용병을 구해서 숲으로 갔다가, 내가 고용한 용병들이 죄다 쓰러질 지도 모르고.”
“그런 거라면 뭐,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게다가 아무리 자비로운 여신님이라도, 망자를 다시 살려내는 가르침은 내려주지 않았을 것 같아.”
“그렇구나. 고마워.”
그렇게 문을 나서려는 순간, 줄리엣의 한 마디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마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어.”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