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 참에 비상탈출!
“그래, 그러니까 지금 챙기러 왔잖아.”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몸이 굳어서 층계참에서 더 내려가지도 못하고, 경계하는 태도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너무 후회스러운 인생을 살아 버렸어. 삶이 흘러가는 걸 그대로 내버려 뒀단 말이야. 그건 ‘내’ 삶이었는데도 말이지.”
터벅, 터벅.
“원래는 이렇지 않았어. 책도 쓰고 싶었고, 남들이 ‘우와’하고 궁금해 할 만한 경험도 잔뜩 쌓고 싶었어. 그렇지만 결국 평범해져서는, 애를 둘이나 낳고, 글 한 편 못 쓰고 살고 있어. 내 인생은 끝난 것만 같았어. 흥미진진함이라고는 바싹 말라버린 채. 정말 끔찍한 하루하루였지…….
그러다 우연히 옛날에 썼던 일기장을 봤어. 딱 너가 쓴 거더라. 그 곳에서 나는 20대의 나를 볼 수 있었어. 시간이 한없이 많이 생기기만을 바라던 나를. 그렇지만 나는 시간이 생겨도 글을 쓰지 않았지. 진지하고 새로운 도전 같은 것도 없었어. 그저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고, 남들처럼 살고, 허우적거리기만 하다가 평범한 사람이 된 거야. 한심하기는…….
그리고 그제서야 펜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지금껏, 그 때만 한 절망을 느낀 적이 없었다. 절망 자체였다고. 나는 이미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펜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어. 아무 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어.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당장에 과거 달력들을 뒤져봤고, 연휴가 가장 오래 끼어 있는 날을 찾았어. 과거로 돌아가 그 때 당시의 나에게 적응도 하고, 또 내 삶을 정리해내려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할 테니까.
나는 지금의 너의 영혼을 밀쳐낼 거야. 또 다른 나를 살아낼 거야. 그리고 그건 반드시 지금이어야 해. 더 이상…….”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뭔가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그런 악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을 사냥하는 사람의 눈이 저런 걸까. 섬뜩했다.
“내가 얘기했지, 죽을 각오를 하고 왔다고.”
도망쳐야 했다. 그 악귀같은, 도플갱어같은 존재의 손에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