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 참에 비상탈출!
도망쳐야 했다. 그 악귀같은, 도플갱어같은 존재의 손에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불길했다.
나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내달렸다. 무서웠다. 계단을 거의 나는 것처럼 뛰었다. 펌프스가 벗겨지길래 아예 벗어 던졌다. 맨발로, 층계의 마지막 부분은 아예 난간만 붙들어서 아래 층계로 몸을 틀어 건너 뛰면서 도망쳤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내가 소리쳤다.
“돈도 많이 벌고, 부자가 돼서, 네가 염원하던 삶을 살아내 줄게!”
“미친, 씨발!”
“살고 싶은 도시들에 한동안 머물면서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온몸으로 모든 걸 창작할게!”
정신 없이 오로지 내달을 뿐이었다. 아까는 한숨 푹푹 쉬면서 한참 내려갔더니 겨우 열 층이었는데, 이제는 무슨 5초에 한 층씩 내려가고 있었다.
‘저건 어떻게 나보다 늙었다는 게 이렇게 빨라!’
미래의 나는 악착같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이미, 달리다가 다치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숨이 찼다. 초등학생 때 오래달리기를 했던 순간이 겹쳐 떠올랐다. 추운 날도 아니었는데, 뜀박질이 계속되니 목에 찬 기운이 돌고 가래가 올라오려 했었다. 그 때의 나는 지독히도 열심히 달렸다. 기록을 단축한다고 해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을 짓누르고 뽐내야지 하는 못된 마음도 없었다. 단지 나는 빨리 달리고 싶었다. 겨우 체력장인데도, 언제 다시 들춰 볼 일도 없을 기록인데도. 그 사소한 긍지와 보람을 향해 달렸다.
뒤를 흘끗흘끗 돌아보며 뛰어 내려갔다. 미래의 나는 혼신을 다해 추격 중이었다. 분명 체력적으로는 내가 우세할 텐데, 거리가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
'저렇게 혼신의 힘을 다 하는데, 어쩌면…….'
또 다른 내가 건넨 제안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이대로 내가 순순히 잡혀 준다면, 그래도 어차피 '나'의 삶일 텐데. 그렇다면 쉬운 모드로 가는 게 낫지 않나. 지금같이 한심하고 답답하게 회사에 매여 사는 내가 아니라, 자산가가 되어서 요트든 비행기든 타면서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나'를 놓아주지 않는 편이 어쩌면 더 '나'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이려나.
덥썩!
잡혀버렸다. 정신이 확 들었다. 이제 겨우 다섯 층 남았는데!
나는 온 힘을 다해 바둥거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엄청 위험했는데, 계단 모서리에 찍히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안중에도 없이 난장판인 몸싸움이었다. 으악 끄악 비명도 비명이었고, 옷이며 팔이며 잡아 늘이고 떨치려 하고, 넘어져서 쓰러진 채로 뒤엉키고. 주사기는 진작에 저 멀리 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스치며 봤던 나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얼굴에는 나이 먹은 주름이 역력했다.
‘사람은 오십 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대.’
누군가가 했던 말이 그 얼굴 위로 겹치며 떠올랐다. 밋밋한 얼굴이었다. 행복하지도, 행복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도 않은, 피로만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겨우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이 벅차서, 목적 없이, 그러나 성실하게 살았던, 그 대가가 바로 저 얼굴이었다.
나는 ‘나’의 머리채를 잡아 쥐었고, 그대로 아래로 내다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