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비치를 거닐며

오키나와 여행기

by 구의동 에밀리

오키나와에는 해변이 많다.


아침에 해변 산책을 나섰다. 조식을 일찍 먹은 덕분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해외 여행을 가서 늦잠을 자고 겨우 조식을 먹었을 텐데, 이번 오키나와 여행은 완전히 반대였다. 임신한 몸이었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기에는 힘에 부쳤다. 자연스레 취침 시각이 빨라졌고, 아침 기상 시각도 빨라졌다. 그만큼 조식도 오픈런으로 먹어서 오전에 시간 여유가 생겼다.


"어디로 갈까?"
"글쎄. 일단은 선셋 비치 쪽으로 가 볼까?"


남편과 함께 호텔 정문을 나서자 오키나와 특유의 느긋한 공기가 느껴졌다. 10월 말의 서울은 벌써 가을 바람이 선선했지만, 일본 본토보다 오히려 대만에 가까운 위치의 오키나와는 날씨도 대만을 닮아 온화했다. 한낮에 구름이 없을 때면 햇볕이 무척 뜨거워졌다. 해변 모래톱을 밟으면 "앗 뜨거!" 하고 팔짝팔짝 뛰게 되는 한여름 날씨였다. 그래도 다행히 아침만큼은 산책하기에 적당한 바람이 불었다.


오키나와에서도 '아메리칸 빌리지'라고 이름 붙여진 이 동네는, 바로 전날 밤에 한 바퀴 돌아봤는데도 낮 시간의 분위기가 완전히 딴세상처럼 달랐다. 분명 밤에는 어두운 하늘 아래에 휘황찬란한 조명이 번쩍이는 모습이 누가 봐도 미국식 대규모 오락 단지였는데, 해가 뜨고 나니까 가족 친화적이고 건전한 테마 파크로 탈바꿈한 뒤였다.




해안을 따라서 주욱 이어진 산책로를 남편과 나란히 걸었다. 캐릭터 강국 아니랄까봐, 때때로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이 귀여운 포켓몬들을 찾을 수도 있었다. 벤치로 변신한 메타몽이라든가, 골목 안쪽에 숨어 있는 피카츄 벽화 같은 요소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산책로 쪽으로는 식당과 카페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중 한 가게는 유난히 사람이 북적였다. 자세히 보니 '스팸 무스비'를 파는 집이었다. 스팸과 계란말이를 사이에 끼운 형태의 간단한 주먹밥일 뿐이었지만 아침 식사를 하러 온 손님들로 테이블들이 가득했다.


한국의 미군 부대에서 '부대찌개'가 비롯되었다면, 오키나와의 미군 부대 쪽에서는 '스팸 주먹밥'이 탄생한 모양이었다. 호텔 조식에서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게끔 차려져 있어서 한 번 먹어 본 적이 있었다. 흰 밥에 스팸과 계란말이, 게다가 김까지 얹어 먹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미식가들이 최고급 스시니 1등급 쇠고기니 해도, 역시 다들 '알면서도 맛있는 맛'에는 국적을 불문하고 쉽게 넘어가는 게 분명했다.




아침에는 그렇게 선셋 비치를 산책하다가 오후에는 트로피칼 비치를 갔다. 둘 다 이름은 유명한데 딱히 이렇다 할 뭔가는 없는 평범한 해변이었다. 넓은 공원과 곳곳의 조형물, 비치 발리볼을 할 수 있는 네트, 그리고 때때로 놓여 있는 야외 소풍용 테이블들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산책은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졌다. 도대체 어떻게 올라왔는지가 궁금해지는 방파제 위의 작은 게도 몇 마리 발견하고, 가끔은 미군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도 지켜봤다. "여기는 정말 아무 것도 없네?" 하는 감상과 함께, "이 쪽은 땅이 넓어서 야외 콘서트를 해도 좋겠어" 하는 실없는 상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방파제 안쪽의 낮은 돌담에 걸터 앉아서 바다 쪽을 바라봤다. 굽어 있는 만을 눈으로 짚어가면서 "우리가 저기서부터 걸어온 거야" 하고 남편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이전까지는 여행이라고 하면 무조건 '최고의 음식'과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하곤 했다. 마치 사냥감을 찾아 나선 사냥꾼처럼, 두 손 가득히 경험이든 기념품이든 들고서 돌아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집에 와서도 전리품들을 바라보며 '꽤 수확이 좋았던 여행'으로 기억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해안을 산책하면서는 오히려 평범함에서 일상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값비싼 오마카세를 먹거나 혹은 한국에서 절대로 구할 수 없는 특별한 뭔가를 구매해내야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걷기만 해도 평온하고 좋았다. 걷다가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구글맵에서 평점 괜찮은 카페를 검색했다. 그렇게 계획에 없는 카페 일정이 추가되고, 아메리카노에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간식으로 먹으며 기뻐했다. 우산이 없는데 비가 좀 내린다 싶어도 상관 없었다. 적당히 몇 방울 맞으면서 어디 비 그을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면 그만이었다.


그런 생각을 혼자 했었는데, 소로우의 자전적 에세이집 <월든>을 읽으면서 비슷한 문구를 접했다.


기본적인 틀에 가까울수록 삶은 감미로운 법이다. 당신은 낭비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고차원의 법칙을 따르는 삶을 살면 저차원의 세속적인 것들에는 초연하게 된다. 지나친 부를 소유하면 불필요한 것들만 사들이는 법이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p.367)


돈을 많이 지불하지 않고도 행복을 찾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 다소 신선하게 느껴졌다. 고급 스포츠, 명품 패션, VIP 전용 서비스……. 그런 것들은 행복한 인생을 위한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되지 않았다. 비싼 경험을 찾아 다니면 그저 제일인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행복을 얻는 데에 꼭 돈을 낼 필요는 없었다.



(사진 출처 : UnsplashSkaterlun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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