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감각에 대하여

트로이메라이와 에티오피아 한 잔

by 글은

광안리 근처의 작은 카페.

원두를 고를 수 있는 곳이었다.


다양한 원두를 경험하는 걸 좋아한다.

원두의 맛을 미리 짐작해보고,

다른 사람이 내려주는 커피를

조용히 마시는 시간을 좋아해서

이곳에 들어왔다.


테이블 하나,

바에 의자 서너 개 남짓.

2평쯤 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필터 커피를 고르자

사장님은 네 가지 원두 중

하나를 골라보라고 하셨다.


날씨는 추웠다.

그래서 은근한 바디감을 가진,

조금은 푸근한 원두가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까지 걸어온 피로를

조금은 깨우고 싶기도 했고,

카페 안은 이미 충분히 따뜻했기에

적당히 텐션을 올려줄

재스민 계열의 원두를 택했다.



에티오피아 시다모 벤사 봄베이

바샤 베켈레

레드허니


아카시아 재스민

청포도 백도 천도복숭아

시럽



사장님은 점드립으로 물줄기를 세심하게 조절하며

커피를 내려주셨다.

그 모습이 괜히 중후하게 느껴졌다.

첫 향은

아카시아와 재스민이

은은하게 다가왔고,

복숭아와 청포도를 닮은 산미가

입안을 천천히 맴돌았다.

초콜릿처럼 무겁지 않은,

적당한 단맛이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잔을 내려놓는 순간,

카페 안에 트로이메라이가 흐르기 시작했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향은 잔에 남아 있었고,

산미는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마치 음악처럼, 천천히 도착하는 감각 같았다.


한때, 그러니까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조금은 버거워 보이는 프로젝트에

무슨 깡다구였는지 자진해서 참여했고,

그렇게 6개월짜리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운 좋게도 프로젝트는 순조로웠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끊임없는 유지보수와 쏟아지는 인수인계.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그 시절,

어떤 이유로 이 음악을 듣게 됐다.

잔잔한 선율은 심박수를 낮춰주었고,

달아올랐던 마음은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래서 이 곡은 지금도 나에게 고마운 음악이다.


요즘의 나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다.

여유는 사라지고,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자꾸만 바라게 된다.

매 순간 일희일비하며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왜 예전처럼

이 음악을 먼저 떠올리지 못했을까.

경험이 있었음에도 그때처럼 귀를 기울이지 못했을까. 그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잔을 들었다.


커피는 이미 반쯤 식어 있었지만,

향은 여전히 잔에 남아 있었다.

트로이메라이가 마음의 속도를 낮춰준다면,

이 에티오피아의 커피는

그 차분함을 쉽게 흩어지지 않도록 해주고 있었다.


상황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나를 안정시키는 방식은 조금 달라졌다.


트로이메라이와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