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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ybrush Jan 26. 2019

소모당한 캐릭터: 스카이캐슬의 황우주

왜 황우주는 가장 주체적인 가정에서 주체성 없는 아들이 되었나?

정말 정말 오랜만에 TV 앞에서 시간 맞춰 본방 사수하는 드라마가 생겼다. <SKY 캐슬>이다. 어제 축구 때문에 결방을 했는데 어찌나 아쉽던지. 이제 고작 2회 남았는데 마지막 회를 보려면 또 한 주를 기다려야 한다.


스카이캐슬을 보면 인물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욕망이 섬뜩할 정도로 번뜩거린다. 혜나의 죽음으로 신분 상승을 위해 과거를 속이는 정도는 애교가 되어 버렸다. 이미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이 대대손손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기 위해 교양 있는 척을 하면서 뒤로는 온갖 추잡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는 ‘폭로’는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드라마의 엄청난 인기로 우리 시대의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세 등등한 캐릭터들, 한서진과 딸 강예서, 그 가정을 파탄내고 동시에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모순된 욕망에 시달리는 혜나까지 주체적인 욕망과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인물들 사이에서 유독 어깨를 펴지 못하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황우주다. 황우주는 내내 오글오글 쭈뼛쭈뼛한 모습만 보이고, 엉성한 연기력까지 지적을 받아 왔는데, 이제는 살인사건의 결정적 용의자 신세로까지 추락해 버렸다. 그런데 드라마의 캐릭터 관계를 살펴보면 이건 꼭 황우주라는 인물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스카이캐슬에서 오직 이야기 전개를 위해 소모되는 캐릭터다.


생각해 보자. 황우주는 모두가 주체적(대부분 주입된 욕망이라 주체적이란 말이 어긋나긴 하지만)이고 뚜렷한 욕망에 몸을 던지는 저 'SKY' 캐슬(SKY가 서울대, 고대, 연세대를 뜻하는 말임을 생각하면 절묘하게 중의적인 제목이다. 물론 저들은 KY는 대학으로 생각하지도 않겠지만)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 캐릭터다.


누구의 뜻이건 간에 무조건 서울대 의대를 가고야 말겠다는 예서나, 새로운 가족의 품에 안겨 자기 자리를 찾겠다는 혜나에 비하면 그 사이에 낀 황우주는 공부는 알아서 잘 하지만 스스로 뭐가 되고 싶다거나, 하고 싶다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 황우주는 그저 ‘학생이니까 공부하지’에 가깝다. 거의 유일하게 보이는 욕망은 혜나와 사귀고 싶다는 정도다.


그러다 보니 우주는 나름 충실한 백스토리에도 불구하고 해파리처럼 흐물거린다. 의료 봉사에 정신이 팔린 아버지 때문에 정작 친엄마를 잃었고, 새엄마에게 적응하기까지 방황의 시간을 겪었다. 하지만 그가 되찾은 것은 가족 간의 관계일 뿐, 자기 자신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대사 몇 줄로 처리된 우주의 고통은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의 우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자신의 욕망을 모르니 우주는 극 중에서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다. 혜나는 우주를 좋아하는 예서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우주를 이용한다. 입시 코디 김주영은 혜나의 마음을 열기 위해 우주를 좋아하는 감정을 이용했고, (아마도) 우주를 혜나의 유일한 살인사건 용의자로까지 이용했다. 상호협력과 견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SKY 캐슬 안에서 이처럼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는 캐릭터는 없다.


한 마디로 황우주는 처음부터 예서, 혜나, 김주영 사이에서 탁구공처럼 튕겨 다니며 이용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적으로 소모되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결정적으로 시청자들을 멘붕에 빠뜨린 혜나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전개를 위해서 우주가 필요했다.


예서를 서울대 의대와 황우주라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뜨리기 위해 우주가 필요했다. 스스로의 생생한 욕망과 결핍이 없다 보니 황우주는 뭘 해도 붕뜨고 오글거리는 행동을 반복하다가 김주영의 음모에 걸려든 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 역시 작년에 <드라켄>이라는 판타지 소설을 쓰면서 ‘소모’해 버린 캐릭터들이 있다. 정작 쓰고 있을 때는 그들이 그저 이야기 전개를 위해 봉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가령 악역 중에서 흉악한 양손 검을 다루는 용병 케틀링은, 용병 집단 내의 분란과 갈등이 필요해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의도한 용도에 맞게 소설 속에서 온갖 분란을 일으키다가 필요한 시점에 죽었다.


작가는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맞춰 캐릭터를 만들고, 무대 위에 올린다. 그렇지만 정작 이야기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면 캐릭터는 작가의 뜻이 아니라, 본인의 욕망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 인물들이 얽히고설켰을 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그렇지만 캐릭터 본연의 욕망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해야 할 ‘기능’에 충실해져 버리는, 소모되는 캐릭터도 나오기 마련이다. 스카이 캐슬에서는 그것이 황우주였다. 가장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족의 모형으로 제시된 이수임-황치영 가정에서,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아들 황우주가 사실은 주체성이 결여된 소모되는 캐릭터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곧 11시다. 분석은 이쯤 하고, 이제 경건한 마음으로 SKY 캐슬 19회를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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