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독이 비는 소리

질풍가도(疾風街道), 그 두 번째 바람

by 문장담당자

"쌀독이 비는 소리 - 100일간의 취업 전쟁, 가장 낯선 길 위에서"


쌀독이 비었다.

그 말은 문학이 아니었다.

은유도, 상징도, 시적 감흥도 없는 그저 '쌀이 없다'는 현실 그 자체였다.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

그날 어머니가 뚜껑을 열며 조금 웃듯 말했던 장면을.

“아들아, 이제는 진짜 바닥이네.”

아무렇지 않게 들리는 그 말 뒤에 어머니가 웃으며 건넨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말에 담긴 조용한 슬픔은 그날 저녁 수저를 들기 전부터 가슴을 눌렀다.

그리고 무너지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표정이 자리했다.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우연찮게 마주한 고전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문장을 곱씹으며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며 교수님의 연구실에 열심히 들락날락했다.

학회 일정과 발표지를 찾아내고, 논문을 찾아 읽고, 국문장편소설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을 키워갔다.

그리고 국내에서 국문장편소설을 주로 연구하시는 분들 중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석사 과정을 듣는 강의실 안의 나는 ‘이 길을 오래 걸을 수 있을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지적 긴장감, 문장에 대한 해석, 서사의 구조를 분석하고 인물을 이해하는 일이 너무도 내게 맞았다.

석사 과정에서의 공부는 때로는 스트레스였지만, 대체로 재미있었다.

하루 종일 고전텍스트를 읽고, 주석을 달고, 비교하고, 학회 발표를 따라가며 '고전의 문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문장으로만 설명되지 않았다.


석사 과정 1년을 막 넘긴 시점이었다.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나에게는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으나, 아버지는 계속 불안함을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현실은 훨씬 빠르게 아주 무섭게 다가왔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짧게 그렇게 말하셨다.
그 이후 우리 집에선 이사, 대출, 담보, 재취업이라는 단어가 식탁 위의 반찬처럼 오갔다.


내게 주어진 건 선택이었다.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지금 당장 현실로 나갈 것인가.

지도교수님께 지난번 말씀드린 논문 주제와 목차 그 이후의 작성 내용을 보여드려야 하나,

갑작스레 중퇴하겠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나.

3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마지막 선택지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생각보다 빨랐다.

생존이 고민을 이겼다.


논문이 아닌 이력서를 쓰기로 하고 자퇴를 결심한 날, 나는 지도교수님을 찾아뵈었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말 끝이 떨리고, 손끝은 차가웠다.

“저… 자퇴를 하려고 합니다.”

이후 이런저런 말들, 마치 나 스스로 변명을 하듯 현 상황을 떠듬떠듬 전달했다.

잠깐의 정적 이후 교수님은 가만히 나를 보셨다.

그러곤 따라오라 하시고는 아무 말 없이 지갑을 꺼내셨고 자리를 비우시더니 ATM에서 현금을 인출해 오셨다.

50만 원.
그걸 건네며 하신 말씀은 이랬다.

“사회로 나가는 네가 얼마나 두려울지 안다. 이건 선물도, 빚도 아니다. 그냥 네가 잘 살아주면 된다.”

나는 말했다.
“교수님… 꼭 갚겠습니다. 100배로… 언젠가 성공하면, 꼭이요.”

그 다짐은 지금도, 아니 어쩌면 평생 내 안에 남아 가장 인간적인 빚의 형태로 살아 있다.


시간이 흘러 입학 때와 다르게 중퇴는 금방이었다.

서류 몇 장의 날인을 통한 제출로 중퇴 처리를 마쳤다.

이후 구직 활동을 하려는 나에게는 스펙이랄 만한 게 거의 없었다.

공채가 진행 중인 시즌이었으나, 여백이 더 많은 나의 이력서 및 포트폴리오 그리고 '아무 경력 없음'이라는 자기소개.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면접에 가면 사람들은 물었다.

“문학 전공이시네요. 왜 인사직을 생각하세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면접장의 공기를 바꾸지 못했다.

불합격,
불합격,
그리고 또 불합격.

100일 동안 반복되었다.
취업까지 약 100일 동안 매일 이력서를 썼다.
정확히 말하면 매일 자기소개서를 한 개씩 완성해 내는 걸 목표로 했다.

책상 앞에 앉으면 공책을 펴고 노트북을 켰다.

취업과 관련된 전략이 정리된 서적을 구매하고 관련 내용의 자료를 찾아보며 공채, 수시 공고를 정리하고, 회사와 직무, 산업 분석을 하고, 내가 뭘 해왔는지를 쓰기 위해 뭘 해왔는지를 되새겨야 했다.

하루에 1개,
열흘이면 10개,
한 달이면 30개.
그리고 100일이 지나자,
나는 약 100개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내 통장 잔고는 1만 2천 원이었고, 내 노트북엔 작성 중인 자기소개서가 있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나날.
미래가 아니라, ‘오늘 점심값’이 고민이던 시간.

한 번은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야, 아직 백수냐?”
장난조였지만, 그 말이 유난히 깊이 박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한번
‘인사’, 'HR'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다.

그러다 우연히 이차전지 부품사에서 신입 채용 공고를 보았다.
해당 회사의 비전, 성장성, 사업 아이템, 동종 업계 내 위치, 거리 등의 정보를 간략하게 확인하고 급하게 자기소개서를 썼다.

일주일 만에 면접을 봤다.

면접장은 작은 사무실이었고 면접관은 네 명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물었다.
“다른 지원자보다 특별한 건 뭐예요?”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 이 일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절실한 사람은,
웬만해선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말 뒤에 작은 정적이 있었고, 거짓말처럼 그날 오후 합격 전화를 받았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와 마트에 갔다.

쌀 20kg 한 포대를 샀다.
계산을 마친 뒤 나는 어깨에 그 포대를 올렸다.

비닐봉지에 담긴 그 쌀이 내게는 금메달 같았다.

‘쌀독이 다시 찼다.’
그건 생존이었고 또한 내 안에 되살아난 자존심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에게도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내 취업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도 기존에 종사하던 업계의 임원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거짓말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고 집안의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짧지 않은 침묵의 시기 이후 오랜만에 온 가족이 외식을 했고 어머니와 동생의 미소는 오랜만에 환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었다.

'아빠… 이 소식 조금만 더 일찍 전해줬으면 나도 계속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생각은 잠깐이었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 아주 오래 남아 있는 문장이다.


이차전지 부품사에서의 회사 생활은 쉽지 않았다.
공대 중심의 회사에서 문과 출신의 인사 신입은 마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절실함’이 나의 무기였고, ‘배우려는 자세’가 나의 유일한 전략이었다.

출근 전엔 채용 관련 뉴스레터를 읽고, 퇴근 후엔 HR 관련 서적을 읽었다.
가끔 문득 떠오르는 논문 자료들은 이제 내게 쓸모없는 기억이 되었지만,
그 시간들은 내가 ‘사람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다.


그리고 그 시절 내 곁에는 지금은 배우자가 된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당시 말없이, 하지만 가장 큰 목소리로 나의 결정을 응원해 줬다.

“공부를 포기하는 게 아니야. 세상으로 나아가는 거야.”
“나는 너를 믿어. 그 어떤 모습이어도.”

그 말 또한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흔들려도 그녀는 내 중심이 되어 주었다.

이차전지 부품사에 입사해 처음 맞은 아침, 나는 회색 셔츠에 정장을 입고 출근을 했다.

사무실의 공기, 공장 라인의 기계음, 모든 게 낯설고 무거웠다.

점심시간, 나는 사무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간단하게 싸 온 간식을 먹으며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기서 잘 적응해 볼게.”

그 메시지를 보낸 순간,

나는
이제 정말
문장 말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을 택했음을 실감했다.


그 100일의 기록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스스로를 믿게 만든 두 번째 질풍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질풍 같은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고, 그 순간의 바람을 잡아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쌀독이 비었던 날, 나는 절망만 한 건 아니었다.
그날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단단한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을 버티는 법을 배웠다.

“내가 그때 살기 위해 선택했던 길은,
지금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