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의 삶을 바꾸는 결심

질풍가도(疾風街道), 그 세 번째 바람

by 문장담당자

"퇴근 후의 삶을 바꾸는 결심 -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나는 이직했다"


아이의 젖병을 소독하며 밤 11시가 넘은 부엌에 서 있었다.

수증기가 가득한 공간 속, 잠든 아내의 숨소리와 갓 씻은 젖병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시간.

그날은 아내가 아이와 함께 잠든 모습을 보고 조용히 방문을 닫은 날이었다.
작은 숨소리, 어둠 속의 아이 이불,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린 아내의 뒷모습.

그때 처음 느꼈다.

이대로 괜찮을까.

'지금의 나는, 이 가족에게 충분한 사람일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는 화성시 관내 중부지역에 신혼집을 얻었고 회사까지는 차로 15km 거리.
지나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그래도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밤엔 다시 같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생활.
그게 내 삶의 리듬이었다.

결혼은 오랜 연애의 연장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함께 했던 사람이었고 마음보다 더 깊은 ‘믿음’이 서로에게 있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진짜 어른이 되는구나’라는 말을 결혼식 날, 서로에게 농담처럼 주고받았다.

그리고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이제, 한 사람을 지키는 걸 넘어서 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

아이를 낳은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밤낮이 바뀐 생활.
아내는 모유 수유로 밤잠을 설쳤고, 나는 아침 8시 출근에 맞춰 일어났다.
아내는 혼자 아이를 안고 거의 하루 종일 집에 있었고, 나는 사무실 책상 앞에서 문서와 숫자 사이를 오갔다.

퇴근은 대체로 공장의 교대근무에 맞춰 야간조에 대한 특이사항 대응을 하다 보면 대체로 저녁 8시였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가면 아이의 얼굴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아내는 피곤에 젖은 채 식탁 위에 밥을 남겨두고 누워 있었다.

한밤중 주방 불을 켜고 찬밥을 데우며 혼자 밥을 먹는 날이 많아졌다.

그 고요한 시간에 나는 종종 무력감을 느꼈다.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정작 가족과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이상한 감정의 모순.


나는 당시 이차전지 부품 제조사에 다니고 있었다.

경영관리팀 인사 파트.
재직 3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배우는 게 많았고 같이 일하는 팀원들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곳은 나의 첫 직장이었다.

첫 직장에서 나는 조직에서 인사라는 기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조금씩 체득해 갔다.

현장에서 채용을 직접 보고, 면접 일정을 정리하고, 인사평가 양식을 다듬으며 ‘인사’라는 말에 조금씩 감각이 생기던 시절.

낯선 업무들이 익숙해지고 조직의 말투가 조금씩 내 안에 스며들던 시기.

그 무렵, 이차전지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타고 있었다.

전기차에 대한 기대감, 고객사들의 잇따른 발주, 사내 분위기도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전기차 수요가 폭발했고 회사 매출도 최고치를 찍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좋을 때' 찾아오는 이상한 긴장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다른 나라에서 원인 불명의 집단 폐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아주 잠깐 스치듯 접했으나, 크게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고객사로부터 한 통의 연락이 왔다.

"출고 일정, 조금 미뤄질 것 같습니다."

"전기차 쪽, 반도체 이슈가 있어서요."

고객사 측 내용이 영업팀으로부터 사내에 퍼지기 시작한 순간 나는 무언가가 꺾이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고객사에서 일정이 미뤄졌다는 통보, 출고량의 감소, 거듭 언급되는 ‘반도체 적체’라는 표현들.

이차전지는 '충전'의 산업이지만, 그 순간 나는 불확실성이라는 단어로 마음이 방전되는 기분이었다.

기술은 멈추지 않지만, 시장이라는 생물은 언제든 방향을 틀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집에서는 아내가 육아로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했고, 퇴근은 주로 저녁 8시가 넘었다.
늦은 귀가 뒤,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아내는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많이 울었어?”
내가 묻자,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해.”

그 말이 아팠다.
웃으며 말하는 그 표정 속에
견디고 있다는 흔적이 너무도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이 회사에 계속 있어도 괜찮을까.

이 산업이 이 흐름을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우리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나눌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헤드헌터의 소개로 반도체 장비 제조사에서 인사담당자 채용 공고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EUV’,
‘리뷰 장비’,
생소한 단어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산업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차전지가 주춤한 지금, 반도체는 다시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이직을 망설였다.
한참 고민했다.

안정적인 걸 내려놓는 일이었고 새로운 산업으로 옮기는 건 두려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가던 질문이 있었다.

“이 직장이 나를 더 크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조금씩 닳게 하고 있는가.”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고 있었다.

아직은 나 혼자만의 결심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그래서 결정했다.

가족을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가까이, 더 오래, 더 따뜻하게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삶의 구조를 원했다.

아이와 저녁을 함께 먹는 삶,

아내와 눈을 마주치며 하루를 이야기하는 시간,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있는 그런 저녁을.

결국 나는 더 늦기 전에, 더 익숙해지기 전에.

이직을 결심했다.

쉽지 않았다.


2022년 10월,
나는 반도체 EUV 리뷰 장비 회사에 입사했다.

그때까진 여전히 기존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출퇴근 거리는 한참 길어졌다.

집에서 이직한 회사인 화성시 동부지역까지 매일 왕복 40km.

아침엔 7시에 집을 나섰고, 밤엔 8시에 넘어서야 돌아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이건 잠시일 뿐이라고, 내가 지금 움직이는 이 선택이 결국 가족을 더 가까이 데려다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입사 100일 후 우리는 회사 근처로 이사를 했다.

회사와 집은 4km 거리.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저녁 6시에 퇴근할 수 있는 구조.
그날부터 나는 진짜 '가족과 함께하는 퇴근'을 하게 됐다.

퇴근 후 아이를 씻기고, 아내와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세 식구가 함께 앉을 수 있는 밤.

그런 날이 드디어 생겼다.


이직은 커리어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나에겐 삶의 결 단위를 바꾸는 일이었다.

나는 더 많이 웃게 됐고, 아내는 예전보다 자주 눈을 마주쳐줬고, 아이는 내 다리에 기대 잠드는 시간이 생겼다.

회사는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반도체 장비라는 복잡한 세계, 기술과 인사의 경계, 전문성의 언어와 조직의 구조.

하지만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배움이 내 가족을 지키는 일과
곧장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낯설고, 산업은 복잡하다.

하지만 나는 느낀다.
이 변화는 두려움을 넘을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는 걸.


지금의 나는 어쩌면 그 어떤 시기보다도 빠르게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삶은 더 조용하고, 더 따뜻해졌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위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이직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장이자 가장 값진 용기다.

이는 내가 스스로를 믿게 만든 세 번째 질풍이었다.

내 안의 질풍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불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바람이 나를 휘청이게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앞으로 밀어주는 힘이 되었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그 노랫말처럼,

내 인생의 전환점에는 언제나 그런 바람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 질풍이 스쳐간 자리마다 나는 사람으로, 남편으로, 아빠로 조금씩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