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그 여름"
'여름'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2015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에 출품된 유럽권 영화였다. 영화에는 두 명의 여자가 나오고 서로는 우연하게 사랑에 빠진다. 둘이 살고 있는 마을은 보수적이고 폐쇠적인 농경사회이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마을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삶을 꾸려나간다. 우연찮게도 최은영의 「그 여름」에도 '이경'과 '수이'라는 두 명의 여자가 나오고 우연하게 사랑에 빠진다.
레즈비언이 등장한 두 작품이 '여름'이라는 공통된 제목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으로 인한 우연이었을까?
「그 여름」의 초반부를 읽다보면 (축구를 하고 건조한 말투의) 수이는 남자로 읽힌다. 최은영은 능청스럽게 사실은 수이가 여자임을 드러내고 독자는 그 시점부터 이 소설이 이성애자들에게 익숙한 헤테로적 멜로드라마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최은영은 온전히 이경 - 수이라는 두 인물의 감정과 관계의 모습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녀들의 성 정체성을 부각해서 어떤 집단과 대립시키거나 퀴어에 대한 사회적인 폭압을 부각하는 구도가 아니라 선명하고 명징하게 인물 자체를 조명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모양을 짓고 있는지 독자 앞에 펼쳐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여름'이란 계절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름은 찬란한 계절. 만물의 생명력이 돋아나고 선명함이 빛을 발하는, 사물은 명징해지고 목소리는 뚜렷해지고 빛은 온 사방에 있어 어디에나 밝은, 어둠은 빠르게 찾아오지 않아 시간은 길고 만남은 끝이 없어 쉽게 헤어지고 싶지 않은, 그런 계절이다.
그리고 여름은 지독한 계절. 무더움과 장마, 악취와 아지랑이, 온갖 벌레들과 해충들. 흘러내리는 땀과 축축해진 양말. 빛에 어디에나 있듯이 그럼자 역시 사방에 우거지는, 소리없는 숲 같은, 쏟아지는 비에 떠내려갈 것 같은, 그런 계절이다.
여름은 양면성의 계절이다. 어쩐지 여름 자체가 사랑과 비슷하지 않은가? 찬란하면서 지독한 보편적인 사랑. 「그 여름」은 평범한 두 사람이 우연하게 만나 서로의 마음을 오해하고 엇갈리고 달라지는 상황으로 인해 헤어지는 흔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은 어느샌가 쏟아져 눈치채는 순간 우리는 그 계절의 한 가운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최은영의 문장은 여름을 닮아 우리에게 자연스레 스며들어와 이경과 수이를 사랑을 하는 두 사람, 그들 만의 아픈 시간을 살아가는 두 사람으로 보게 한다.
여름은 우리의 착각을 부순다. 벚꽃은 이미 져서 없고 질릴 것 같이 푸른 녹음 만이 사방에 가득하다. 우리의 푸름이 더 없이 찬란하고 또 싫었던, 지독했던 계절. 그때 그 여름. 온전하게 두 사람으로서의 사랑만이 충만했던 여름.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결국 '그 여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감을 알게 된다.
우리가 잃은 것들, 혹은 잃을지도 모를 것들에 대해, 피어나고 어느새 져버리는 아무것도 다를 것 없는 사랑에 대해 최은영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문장 역시 여름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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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
나에게 이런 좋은 일이 생길리 없다고…
널 영원히 만날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어. 그럴 주제가 아니니까…
이제 네가 아플가봐 다칠까봐 죽을까봐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데도… 아니야,
다 지나가겠지. 그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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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야."
"이제 네가 날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그 말을 하고 수이는 오래 울었다.
최은영, 「그 여름」, 『2017 제 8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