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2,3,4화를 보고 난 후에 작성했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를 혹시 보고 계신가요? 저는 이 드라마를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처음 이 드라마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지하철의 전광판 광고를 통해서였어요. 박은빈 배우가 주연을 맡은 것만으로도 흥미가 갔지만 방송사가 낯설어 딱히 찾아보려는 의지는 생기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순간 트위터에 <우영우>에 관한 이야기들이 슬쩍슬쩍 나타났습니다. 대부분의 트윗은 <우영우>를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자폐 스팩트럼 장애를 가진 천재 변호사라는 설정부터 서번트 신드롬을 다루는, 즉 자폐인을 차별적으로 바라보는 드라마 아니겠냐는 게 주된 의견이었던 것 같아요. 지하철 전광판 광고 자체만을 봤을 때 저는 주인공이 자폐 스팩트럼을 가진 변호사라는 걸 사실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상한’이라는 수식어가 그저 좀 엉뚱하고 기발한 기질을 가졌다는 뜻으로 읽혔고, 박은빈 배우의 전작(청춘시대, 스토브리그)들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심증이 굳어졌던 것 같습니다. 저는 트위터의 여론이 얼추 맞다고 생각하여 이 드라마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차피 최근에는 영상매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우영우>가 넷플릭스에서 송출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드라마에 대한 평가가 방영 이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뒤, 한 번 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뭐 죽는 것도 아니니 1화만 보자, 고 결심한 저는 저번 주 수요일에 이미 방영된 3화까지 쭉 달리게 되었습니다.
<우영우>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 말해보고 싶습니다. 일단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 보입니다. 배우진들의 연기가 좋고, 연출, 각본, 음악, 미술 등등에서 거슬리는 점이 별로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 드라마의 유머가 좋습니다. <우영우>의 유머를 주로 담당하는 캐릭터는 주현영 배우가 연기하는 ‘동그라미’(우영우의 절친), 강기영 배우가 연기하는 ‘정명석’(우영우의 시니어 변호사)인데, 다른 조연들 역시 코미디 연기가 일품입니다. 코미디 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드라마를 좋아하는 제 취향과 꼭 들어맞아 더 좋게 보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탐정극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본 드라마 <언네츄럴>, <MIU404>와 비슷하게 주인공은 (법의학자, 기수, 변호사로 다르지만) 맡게 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탐정’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을 지닌 주인공이 모순과 거짓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히어로 서사는 새롭지는 않지만 여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영우가 ‘자폐 스팩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이 마지막 이유는 문제적입니다. 문제적이라 보입니다. 왜일까요. 이 부글거림이 저에게 고민거리입니다.
<우영우>는 빠르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우영우>의 시청 후기가 올라왔고 심지어 ENA라는 잘 들어보지 못한 방송사 채널을 찾아 본방사수를 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1화에서 시청률은 0.9%였지만 5화에는 10배가량 상승한 9%를 기록했습니다.(마지막화는 17.5%로 5화에서 약 2배로 뛰었네요). 넷플릭스의 한국 순위에서도 TOP 1에 올랐고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외국의 넷플릭스에서도 순위권에 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유튜브 클립의 댓글이나 트위터, 커뮤니티 등을 보면 재밌다, 귀엽다, 힐링, 감동…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표현하는 키워드들이 자주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는 잘 만들었다, 재현이 훌륭하다, 연기가 탁월하다… 등등 드라마의 완성도를 칭찬하는 반응들도 많습니다. 절대 빠지지 않는 반응은 장애를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반응을 종합하면 <우영우>는 재미, 감동, 완성도, 의미까지 모두 담은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속 ‘우영우’를 그저 귀엽다고만 바라보아도 되는 걸까요? 드라마를 보고 있는 저 역시 우영우가 귀엽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귀여움을 느끼는 제 자신에게 의문이 생깁니다. 저는 정확히 무엇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고 있는 걸까요? 박은빈 배우인지, 우영우 캐릭터인지, 말투인지, 혹시 자폐 스팩트럼 장애인지. 이 ‘귀엽다’는 느낌의 경로를 거꾸로 되돌아가 보려 합니다.
귀엽다는 주접(?)에 대해 일종의 거절 의사를 내비친 장면이 두 가지 정도 떠오릅니다. 하나는 디즈니 영화 <주토피아>의 ‘주디’, 또 하나는 아이돌 가수 ‘야부키 나코’의 아이즈원 활동 당시 브이 라이브를 편집한 유튜브 영상입니다.
<주토피아>에서 주디는 초식동물인 토끼로, 경찰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에서는 주디가 경찰이 될 거라 믿지 않습니다. 경찰 업무는 으레 육식동물만이 수행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으니까요. (한국의 남경과 여경을 대하는 태도 차이가 떠오르는군요). 하지만 주디는 초식동물의 ‘신체적 한계’를 이겨내고 당당히 수석으로 합격해 경찰관이 됩니다. 주디가 처음 경찰서에 출근한 날 안내처에서 도넛을 먹고 있는 뚱뚱한 치타 ‘클로하우저’와 마주합니다. 클로하우저는 주디를 보자 말합니다. “어.머.세상에. 진짜로 토끼가 왔네. 말도 안돼! 자기, 그거 알아? 자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귀여워.”(O.M.Goodness. They really did hire a bunny! What! I gotta tell you, you are even cuter than I thought you’d be.) 주디는 이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 이런 말 좀 불편하겠지만… 토끼가 다른 토끼에게 귀엽다고 할 수는 있는데 그걸 다른 동물이 말하면… 좀…” (Oh, ah. You probably didn’t know… but a bunny can call another bunny “cute”. But other animals do it… It’s a little…). 클로하우저는 이에 허겁지겁 사과합니다.
두 번째 장면은 이렇습니다. 브이앱을 하고 있는 아이즈원 멤버들(은비, 채원, 민주, 혜원, 나코)에게 누군가 채팅으로 ‘나부키 야코’라고 한 것을 채원이 읽습니다. 나부키 야코는 나코의 성과 이름의 첫 글자를 바꾸어 나코를 놀리는 밈 중의 하나입니다. 나코는 “아니에요. 저 야부키 나코예요. 자꾸 나부키 야코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머지 네 멤버는 나코의 말투를 귀여워 하는데요. 나코는 화가 난 듯 “아니 그냥 얘기하는 건데 왜 자꾸 귀엽다고 하는거야.”라고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민주는 살짝 당황한 듯 서둘러 “너 안 귀여워”라고 하며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합니다. 나머지 멤버들도 나코의 화난 말투를 의식한 듯 장난스럽게 안 귀엽다고 말을 하면서 영상은 끝납니다.
두 장면에서 주디와 나코가 귀엽다는 평가를 거부한 이유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둘은 타인이 자신을 귀엽다고 봐주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코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나코는 그저 자기 자신대로 행동한 것 뿐인데 그것을 사람들이 ‘귀엽다’고 해석하고 있으니까요. 그냥 말하는 것과, 귀엽게 말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나코는 구분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진화론은 ‘귀여움’을 포유류가 새끼일 때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양육자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기제라고 설명합니다. 몸에 비해 크고 동그란 머리, 얇은 목소리, 사회적으로 서투른 행동 등을 보았을 때 귀엽다고 느끼는 것을 생물학자 콘라트 로렌츠는 ‘아기 스키마’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즉, 누군가가 나를 귀엽다고 보는 것은 나를 ‘아기 같다’고 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코가 ‘나부키 야코’라는 별명을 거부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 그저 아이의 투정처럼 여겨짐을 항의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주디의 말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다른 동물이 그러면 좀 그렇다’는 것인데요. 이 대사는 인종주의적인 국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백인이 동양인을 두고 “네 작은 눈 정말 귀여워!”라고 말했을 때 동양인은 알 수 없는 불쾌함과 섬뜩함을 느낍니다. 백인이 지금껏 세계사 속에서 다른 인종들을 노예로 삼고 타자화 했던 역사적 경험이 우리 몸 안에 내재되어 있으니까요. 백인이 귀여움을 느끼는 지점은 나의 작은 눈 자체라기보다 동양인으로서의 작은 눈일 것입니다. 같은 동양인이 ‘너의 작은 눈이 귀여워’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가질 수 밖에요. 마찬가지로 토끼들끼리 귀엽다고 하면 그 판단은 그 토끼가 가지고 있는 어떤 고유한 특성에서 온 것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지만 만약 다른 동물이 토끼에게 귀엽다고 했을 때는 그저 상대가 ‘토끼’이기 때문에 귀엽다고 느꼈다는 혐의가 생기게 됩니다.
두 가지 장면을 통해 ‘귀엽다’는 칭찬(?)은 정치적이고 상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건네야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상대가 귀여움을 의도하지 않았을 때, 혹은 상대의 정체성 자체를 귀엽다고 말할 때 듣는 사람은 모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를 미성숙한 사람으로 보는건가? 혹은 나의 인/종, 국가, 나이, 성별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는건가? 라는 의심이 생겨나기 때문이겠죠. 이 의심은 합리적이고 역사적입니다.
다시 <우영우>로 돌아와봅니다. 작중 속 우영우는 귀엽습니다. 손해의 개념을 가르쳐주기 위해 주니어들에게 ‘손해가 어떻게 나뉘지?’라고 물어보는 시니어 변호사 정명석에게 “정명석 변호사님은 변호사 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셨는데 손해가 어떻게 나뉘는지도 모르셨습니까?” 라고 말하는 우영우, 아빠가 만든 김밥에서 햄이 다른 제품으로 바뀌었음을 눈치채고 “맛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뒤 햄을 일일이 골라내 X자로 그릇에 놓아둔 우영우, 시도 때도 없이 고래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우영우, 높낮이 없이 일정한 목소리 톤을 유지하며 빠르게 말하는 우영우, 발음 발성 연습을 시키는 절친의 구호를 따라할 때 “아, 에, 이, 오, 우..영우..”라고 슬쩍 자기 이름을 붙이는 우영우… 이런 모습에서 귀여움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저는 우영우를 미성숙하다고 보며, 보호해주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고 있는걸까요? 작품에서 우영우를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송무팀 직원 이준호나 로스쿨 동기 최수연 변호사처럼 우영우가 안전하게 회전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걸까요? 분명히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모든 생명체에게 귀여움은 내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존재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이 완벽하지 않음과 결합될 때 귀여움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귀여움을 완성시키는 것은 상대의 서투름을 인식하고, 그 서투름을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타인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서투르다는 편견이 전제되어 있는 존재에게 건네는 ‘귀엽다’는 말과, 사회문화적으로 지위가 동등한 존재에게 의외의 서투름을 발견했을 때 건네는 ‘귀엽다’는 말이 동일한 무게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우영우를 귀엽다고 보는 이유는 그가 자폐 스팩트럼 장애를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폐가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용인될 수 있는 서투름’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죠. 우영우의 말투를 클립으로 잘라내 유튜브에 전시해 귀여워하는 댓글들을 비판하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영우의 말투 자체가 귀엽게 보이고 싶어 의도한 것은 아닐 겁니다. 앞서 예시를 들었던 나코처럼요.
휠체어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를 두고 차가운 태도로 대하는 사람들과 우영우를 보며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다른 사람들일까요? 비장애인들 입장에서 ‘용인할 수 없는 서투름’을 가진 장애인은 비난하고, ‘용인할 수 있는 서투름’을 가진 장애인을 귀여워하는 풍경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여기까지 오면 ‘그럼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만들지 말라는 거냐’는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만드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는지’도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장애인이 가진 ‘서투름’이 과연 정말 부족하고, 어설프고, 무능력한 것인지, 지극히 비장애인의 위치에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영화 <맨발의 기봉이>를 연기한 신현준은 한 예능프로에서 ‘기봉이’ 캐릭터를 희화화해 많은 비판, 비난을 받았습니다. 신현준은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지만, 그 잘못에 우리의 책임은 없는 걸까요? 학창시절 많은 아이들이 ‘기봉이’를 레퍼런스 삼아 지적장애인을 흉내냈을 때, 수 많은 기자들이 신현준에게 ‘기봉이’ 연기를 요구했을 때 비장애인 시청자는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를 서서히 외면해왔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우영우를 이러한 성찰 없이 보게 된다면 비장애인의 위치를 망각한 채 누군가는 또 다시 우영우를 흉내내고 그것을 귀여움의 대상으로 삼을 것입니다. 우영우는 귀여운가요? 라고 처음에 물었지만 중요한 것은 우영우를 귀엽다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보다는 비장애인으로서 자폐인과 마주할 때 나의 위치를 떠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영우>는 세심하게 만들어졌다고 보입니다. 3화에서 문상훈 배우가 연기한 ‘김정훈’ 캐릭터 역시 자폐 스팩트럼 장애인이지만 우영우와 같은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영우는 분명 천재여서 변호사가 되었고, 대형 로펌에 취직할 수도 있었지만, 지나가는 행인에게 ‘화이팅’이라는 말을 듣거나, 택시 운전사에게 대신 돈을 내주려 나서도 무시당하곤 합니다. 우영우가 “그게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이 장애의 무게입니다.”라고 말할 때 비장애인 시청자들은 내가 실감하지 못하는 그 무게를 가늠해보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이 드라마는 우영우를 그저 천재, 서번트 신드롬으로 보여주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여줍니다. 장애인 주인공을 비장애인 연기자로 등장시켰을 때의 비판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의지만으로 이 작품을 ‘좋은’ 드라마라고 단정하고,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의지는 비유하자면 스타트라인과 같습니다. <우영우>는 꽤 괜찮은 스타트를 뗀 주자입니다. 관객으로서의 저는 여전히 복잡한 마음을 가진 채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영우의 귀여움을 자폐 스팩트럼 장애와 분리해서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주디의 말에서 배웠듯, 비자폐인인 저로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느껴도 우영우의 귀여움을 자폐와 분리해서 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비장애인 연기자가 아무리 훌륭하게 장애인을 재현하여도 장애에 대해 함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영우>는 벌써 많은 비판점들, 논점들을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폭발적 인기가 어떤 말들과 모습들을 만들어낼지 지금은 알 수 없으니, 저는 일단 이 드라마가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성실하게 지켜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