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아메리칸 반달리즘 시즌1>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영웅이나, 역경을 딛고 성장하는 소녀/소년은 이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는 바보들과 바보들을 찍는 카메라만이 등장한다. 카메라 속 사람들은 찌질하고, 유치하고, 관종이고, 한심하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스럽다. 작품에서 응원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원래 그렇게 멍청하고 한심했을까, 아니면 카메라가 그들을 멍청하고 한심한 것처럼 보이게 했던 걸까? 사건은 외설스럽고 인물들은 쓸데없이 진지하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하노버 고등학교 교직원 주차장, 모든 차량에 음경(Dick)모양의 스프레이 그림이 그려진다. 반달리즘(공공기물파손죄)의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멍청하고 고약한 짓을 자주 일삼기로 유명한 딜런 맥스웰. 하지만 과연 그가 진짜 범인일까? 의문을 밝히기 위해 같은 학교 남학생인 피터 맬도나도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다큐의 제목은 〈아메리칸 반달리즘〉, 이 드라마의 제목과 같다. 다시 말해 시청자는 〈아메리칸 반달리즘〉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아니라, 피터 맬도나도가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셈이다. 마치 구독하는 유튜브 동영상처럼,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아프리카, 트위치 방송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아프리카, 혹은 트위치를 통해 개인방송을 송출할 수 있으며, 자기가 찍은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영상이라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얻은 대가로 ‘대상화’라는 폭력에 직면해야만 한다.
대상화란 어떤 존재를 특정한 의미에 가두는 것을 말한다. 공교롭게도 총을 쏘다(Shoot a gun)와 카메라로 찍다(Shoot in camera)라는 문장은 Shoot이라는 동사를 공유한다. 총은 발사되는 순간 상대를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박제하고, 카메라는 돌아가는 순간 상대를 이미지로 박제한다. 카메라의 작동 방식은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총을 겨누거나 쏘는 행위와 유사하다.
지금에 와서야 개인방송에 대한 생산적인 문화가 정착되고 기본적 윤리의식이 자리 잡았지만 초창기만 해도 BJ들은 시청자들을 유도하기 위한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컨텐츠를 주로 제작했다. (물론 지금도 이런 류의 컨텐츠 제작자들은 잘만 방송 중이다). 그러한 BJ들이 자기 방에서 자기를 소재로 선정적인 컨텐츠를 제작할 때까지만 해도 문제는 개인적 윤리 차원에서 공전할 뿐이었지만,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오자 문제는 사회적인 맥락으로 팽창했다. 한 BJ가 생방송으로 공공장소의 모습을 송출하고, 시청자들은 그곳을 지나가는 일반인들의 외모를 품평하는 등의 혐오 표현을 쏟아낸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일반인을 찍고 그들에게 욕을 했다는 사실을 넘어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카메라가 공공의 영역으로 밀고 들어와 사람들을 공격하고 대상화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일상과 현실이 카메라에 의해 포착될 때 그 모습은 카메라를 쥔 사람과, 녹화된 영상을 편집하는 사람, 그리고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모든 일상은 대상화의 표적이 되어있다.
〈아메리칸 반달리즘〉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대상화의 공포다. 반달리즘Vandalism이 발생하는 곳은 그저 고추 그림이 그려진 자동차들 뿐만이 아니다. 카메라를 들이미는 모든 곳에서 현실의 공공성과 개인의 인격이 조각난다. 딜런은 파티에서 사람들과 함께 자기의 모습을 담은 〈아메리칸 반달리즘〉을 시청한다. 다큐멘터리 속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딜런을 ‘멍청하다’고 말하고 딜런의 표정은 굳어진다. 섬뜩한 장면이다. 피터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다큐멘터리를 시작했지만, 다큐멘터리 속에서 묘사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진실인가에 대해서 피터는 답하지 못한다.
다들 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나인가 보지
진실은 공공적이다. 땅, 다리, 철도, 전기, 물처럼 모두에게 필요하고, 하나로 수렴되지 않으며,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러나 때로 누군가가 진실을 소유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진실을 독점한다. 카메라가 멋대로 사람들을 담고, 편집자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진실의 공공성은 종종 지켜지지 않는다. 진실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때로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만하다’라고 말하기도 하니까.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그렇다’는 사실보다 힘이 셀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으니까. 공공으로서의 진실이 파손(Vandalize)될 때, 우리는 바보가 된다. 바보가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