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인 냅, 『개와 나』
『개와 나』의 원제 “Pack of Two”를 직역하면 2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쌍쌍바를 사면 2개의 바가 들어있는 것처럼, 캐롤라인 냅은 인간과 개가 마치 한 묶음의 두 존재 같다고 본 듯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친구의 정의, ‘또 하나의 나’와 비슷한 것도 같다) 다만 부제 ‘The Intricate Bond Between People and Dogs’로 미루어봤을 때 이 묶음의 양상이 단순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얽히고 설킨Intricate 개와 인간 사이의 유대Bond는 인간의 우정과는 어떻게 같고 또 다를까. 그 양상을 통해 우정의 무엇을 더 배울 수 있을까.
한국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약 1천 만명을 넘어섰다고 하는 지금, 개가 ‘친구’라는 관념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2024년 ‘개 식용 금지법’이 통과되었고, 개는 친구이자, 가족으로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반려인들과 개의 관계를 인간 친구, 인간 가족과 동일하다고 일축할 수 있는걸까? 냅이 자신과 루실과의 관계를 ‘무언가 다른’ 것으로 설명하려 하자 인간 친구 리사는 “섬뜩하다”며 소리친다. 냅이 루실에게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애착, 기쁨, 괴로움을 설명하기 포기한 채, 상투적인 개의 ‘이점’을 말하자 그제야 리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개는 좋은 친구지.”
친구는 어찌보면 편리한 단어다. 냉동된 만두를 뜯어 전자레인지에 돌리듯이, 고정되어 있는 ‘친구’라는 관념을 그저 개에게 갖다붙이기만 하면 모든 게 쉽게 설명된다. 개는 친구처럼 즐거움을 주고, 위안을 주고, 평등하게 서로를 기쁘게 해준다. 냅은 개가 주는 기쁨, 개와 함께하기로 결정하면서 동반되는 환상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사람들이 [개를 키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건 개를 키우는 일이 저마다 품은 디즈니의 꿈, 그 뒤에 어른거리는 개인적 환상과 열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36).
냅이 개를 키우기로 한 것은 오랫동안 씨름해온 알코올 중독, 급격히 바뀌어버린 인간관계에 따른 후유증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냅과 루실의 처음 대면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지 않고, 종 간 위계를 어렴풋이 내포하는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유기견보호소에 가두어진 개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어떤 개를 ‘고를지’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은 분명 ‘우정’으로 표현되기는 어렵다. 특히 상호성, 동의, 대화, 덕德과 같은 개념이 동원되는 인간 간의 우정과는 더더욱 합치하지 않는다. 냅이 그 많은 개들 중 루실을 ‘선택’한 이유는 어떤 직관, 환상, 동일시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녀석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던 것 같다. 닻을 잃고 표류하는, 보살핌이 필요한, 애착할 가정도 가족도 없는 어린 암컷. 바로 그 점이 내 결심을 이끌어낸 것 같다. 녀석의 연약함이 내 깊은 환상에 다가온 것이다. 우리 서로 애착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가정과 가족 비슷한 어떤 것을. 우리 둘이서. (44)
이 장면은 ‘우정’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해준다. 애초에 우정은 ‘평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친구가 ‘되’는가? 어떻게 친구를 ‘고르는’가? 우리가 친구를 ‘선택’하는 과정은 얼마나 환상과 동일시로부터 자유로울까? 애착은 ‘발생’한다기보다, ‘결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다종적 우정, 혹은 종 간 우정을 말하기 위해서 종 간 위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종 간 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종 간 우정이 ‘불가능’하다 단정짓는 것은 개와 인간 사이의 얽히고 섥힌 복합적Intricate 감정과 유대를 그저 착각이나 허구로 치부해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개와 인간 사이에는 분명 어떤 정동이 존재한다. 이 정동을 인간중심적 용어인 ‘친구’나 ‘가족’으로 쉽게 해소해버릴 때 개는 인간 질서에 안정적으로 포섭된다. 안정적인 포섭은 반대로 종 간 위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여러 장면들을 지운다. 예를 들어 돈까스를 먹고 있는 인간이 자신의 강아지에게 돈까스를 나눠주지 못해 슬퍼하는 장면은 어떨까. 어떻게 개는 인간의 가족이 되고, 돼지는 가족이 되지 못할까. 개와 돼지는 먹히거나 먹히지 않는 가운데, 타인을 비하하고 싶을 때는 함께 상징적으로 (‘개돼지’라고) 동원된다.
이러한 딜레마를 준거점으로 삼아 질문해보고 싶다. 인간이 한 마리의 개를 ‘애착’하고자 하는 관계로 들일 때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종 간 위계와 그 사이에 발생하는 애착을 어떻게 함께 고려하면서 ‘우정’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까? 캐롤라인 냅이 『개와 나』에서 루실과 함께 만들어내는 여러 장면들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게끔 몇 가지 힌트를 제공한다. 4장에서 위계질서를 훈련시키는 냅은 개의 본성, 개의 행동에 따른 주인의 사회적 위신, 지휘와 사랑 등등, 인간-개 사이의 불편한 관계 설정을 이야기한다. 8장에서는 개와 함께 사는 삶에서 어느 순간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남성 애인, 혹은 다른 사람들의 빈자리를 골똘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욕망을 성찰하기도 한다. 9장에서는 개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평온함을, 그저 개가 ‘착해서’, ‘순종적이어서’라고 해석하기보다, “아마도 그들이 다른 종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너무나 명백한 경계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공정함에 대한 질문도 일으키지 않고, 권력의 불균형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도 들쑤시지 않고, 우리를 갑갑함에 몸 비틀게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248)이라고 결론지어본다.
물론 캐롤라인 냅에게 정치적 한계가 없지는 않다. 그는 메사추세츠에서 태어나 보스턴에 거주한 중산층 백인 여성으로, 개와의 관계를 해석하는 방식, 그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는 방식은 그러한 생애 경험에서 비롯된다. 개-인간의 관계를 어느정도 낭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냅이 백인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적어도 냅 자신이 환상을 가지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고, 개와 인간이 분명 다른 존재라는 점을 직시했다는 점에서 개-인간에 대해 더 나아간 정치적 상상이 가능해진다.
지금의 우리(인간)는 개와 어떤 관계를 상상하고 있을까? 개는 ‘친구’일까? 혹은 ‘가족’일까? 우리가 개와 다른 ‘종’이란 걸 알면서, 똑같이 따뜻한 살flesh을 가진 존재라는 앎은 어떤 정동을 발생시키는 걸까? 인간-개 사이의 친밀함을 ‘우정’이라 만약 부를 수 있다면, 인간 간의 우정은 또 어떻게 다르게 사유될 수 있을까? 냅은 죽기 전까지 루실에게서 답을 찾았던 것 같다. “비록 그 답까지 주지는 못한다 해도, 녀석은 나를 그런 질문을 향해 조용히 끌고 간다. 그래서 나는 목줄을 잡고 따라간다.” 인간은 개를 고르고 훈련시키지만, 개 역시 인간을 훈련시키고 끌고 간다. 우정의 의미가 서로에 대한 훈련, 서로에 대한 이끌림, 서로에 대한 속박Pack이라고 하는 듯 말이다.
저자 정보
캐롤라인 냅(1959.11.08~2002.06.03)
저작들
Drinking: A Love Story (1996)
Pack of Two: The Intricate Bond Between People and Dogs (1998)
Appetites: Why Women Want(2003)
The Merry Recluse: A Life in Essays (2004)
번역서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고정아 역, 2017)
남자보다 개가 더 좋아(고정아 역, 2007) ; 개와 나(고정아 역, 2021)
세상은 왜 날씬한 여자를 원하는가(임옥희 역, 2006) ; 욕구들(정지인 역, 2021)
명랑한 은둔자(김명남 역,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