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울프 토템> 우리 모두의 미필적 고의에 대하여

by 정재광

<울프 토템 (Wolf Totem)>

(2015, 장 자크 아노, 중국/프랑스)

[2015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문화대혁명 시기(1969년)의 중국, 베이징의 젊은 대학생 첸젠은 일종의 계몽사업을 위해 내몽고로 파견된다. 늑대를 신성시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주민들(몽골족)과 욕망의 문명화를 밀어붙이는 중국 정부(한족). 이 두 축 사이에서 그는 늑대를 기른다는 잘못된 방식으로 가로지르기 -혹은 접합-을 시도한다.

양측은 늑대를 대하는 방식에서 크게 갈린다. 늑대가 대량으로 사냥해 얼려놓은(!) 가젤을 일부 나눠먹는 쪽과 남기지 않고 모조리 훔쳐 가는 쪽, 개체 수 유지를 위해 늑대 새끼를 죽이는 쪽과 안전을 핑계로 (가죽을 얻으려) 늑대를 몰살하는 쪽. 늑대를 기르려 하는 첸젠의 방식은 공생의 측면에서 전자에 닿아있는 듯 보이지만, 늑대의 생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데리고 산다는 점에서 근대 문명의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그는 몽골족 여인과 정을 나누면서도 베이징으로 돌아가려는 선택을 굽힌 적이 없다.

그럼에도 첸젠의 위치는 흥미롭다. 그는 문명의 흐름 속에 있지만 늑대에 끌린 것은 욕심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그 사이 일말의 성장을 해내기도 한다. 늑대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대장 늑대의 최후가 숭고하도록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첸젠의 힘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 이전에도 -그를 내내 비난하는 와중에- 묘한 심리적 동조를 느낄 수 있다. 그건 문명의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그 편의 속에 죄책감을 묻어온 인류의 보편적 혐의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를 범해 옴으로써 우리 모두가 첸젠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구도와 주제가 명징하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보여준 영화가 이전에 과연 있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절반 이상은 다큐멘터리처럼 촬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의 등장인물 중에서 딱 그만큼이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7년의 준비와 5년의 촬영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제작진과 더불어 고생한 늑대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가지고 당당히 엔딩 크레디트에 올랐다. 그들의 영화다. (15.07.30.)


20140605200032479997.jpg?type=w773 [사진= 영화 울프 토템 스틸컷(아주경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