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야곱과 에서는 왜 그렇게 싸웠나?

이름에 담긴 정체성 - 야곱과 에서(1)

by 이진석

선수 입장 - 태중에서부터 싹튼 갈등

아브라함 가문도 참 손(孫)이 귀한 가문이다. 가나안으로 이주하고도 한참(25년)을 기다려 아들을 낳더니, 그 손자도 20년을 기다려 아들을 본다. 다행이라면 이번엔 일타이득, 쌍둥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녀석들이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싸움질을 한다는 것이다. 리브가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태동이 심해서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았을 것이다. (제사를 드렸다는 건지, 신탁을 받으러 누군가를 찾아갔다는 건지, 점을 봤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주신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창25:23, 새번역)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역전의 예언’. 성경은 이 짧은 문장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긴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먼저 밝혀둔다.

이렇게 성경 속 인물들의 인생 여정은 종종 태중에서 예고된다. 이삭과 이스마엘 그랬고 야곱과 에서, 사무엘과 삼손,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태중의 예언을 성취하며 살아갔다.

이 말씀은 에서와 야곱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말씀이었다. 두 형제가 각각의 민족을 이룬다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자, 두 형제의 인생 여정에 대한 힌트를 귀뜸해 준 것이다.

예언의 성취인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저항인지 태어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먼저 나가겠다고 다투었던 모양이다. 뒤에 나온 놈은 먼저 나온 녀석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었다. 먼저 나가려는 녀석의 발목을 잡고 방해하는 듯한 자세가 하도 아크로바틱해서 기록에도 남았겠지. 그리고 태중에서의 싸움은 두 형제의 오랜 원한에 대한 복선이자 이스라엘과 아랍인들 사이의 민족 갈등으로 자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름 - 정체성의 표현

다음은 이 형제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예로부터 우리나라도 이름을 짓는데 무척 공을 들였다. 태어난 연월일시를 따져 사주에 맞추기도 하고, 음양오행에 따른 부수를 찾아 짓고, 좋은 의미도 담아야 하고, 음성학적으로도 부르기 좋은 이름을 찾느라 한참 고민한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 사람들의 성격을 좌우하며 나아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양반들의 작명 센스 좀 보라. 큰 아들 이름은 '털보'이고 작은 아들 이름은 '잡는 자'다. 에서와 야곱이라는 이름은 후세에 의해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혹자는 유목민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라고 하더군. 어쨌거나 '털보'와 '잡는 자(사기꾼)'라는 이름은, 그들의 삶의 여정을 암시하는 하나의 복선으로 세팅된다.


내가 형이 될 거야 - 장자 자리에 대한 집착

아이가 자라, 에서는 솜씨 좋은 사냥꾼이 되어서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 되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창25:27-28, 새번역)

많은 사람들이 이삭이 편애한 것을 문제 삼지만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이유는 족장으로서의 자질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에서에게는 사냥을 해 오는 능력 - 거친 자연을 극복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에 비해, 야곱이 지닌 가정적인 능력은 남자 - 특히, 족장으로서는 '쓸모 없는' 자질이었다. 따라서 이삭은 에서의 인격적, 신앙적 흠결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자신이 후계자로 점찍어 두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일까 - 에서는 좀 거침없이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 때나 부엌으로 들어와서 먹을 것을 요구하고는 다 먹고는 그냥 나가버리는 식이었다는 거지. 그 모습을 보면서 야곱 또한 자신이 장자였으면, 하는 불만이 생겼을 것이다.

어느 날, 야곱에게 기회가 생긴다. 스튜를 만들고 있는데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들어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야곱은 스튜를 만들고 에서는 지치고 배고픈 상태라니. 에서가 올 시간에 맞춰 요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야곱에게는 '장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항상 가득했고 기회를 만들었는지, 기회를 잡았는지 몰라도 그 기회를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다.


에서: 배고파 죽겠다. 붉은 스튜 좀 줘. I'm starved! Give me some of that red stew!
야곱: 좋아. 대신에 장자권(right of firstborn son)을 나한테 줘.
에서: 지금 죽게 생겼는데 장자권이 나한테 뭐가 중요하겠니?
야곱: 먼저, 장자권이 나한테 준다고 맹세해.
그래서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판다는 맹세를 했다.


굳이 오늘날의 상황에 대입해보자면, 에서는 '야, 먹을 것 좀 주면 내가 너보고 형이라고 할게.'라는 정도로 받아들인 듯하다.

이 대화에서 에서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먼저, 자신의 배고픔을 과대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굶어 죽을 정도 (I'm dying of starvation)일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 배가 고프다. ', '무엇을 좀 먹었으면 좋겠다.' 정도로 말해도 될텐데 거칠고 과장된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고 있다. 이삭에게는 아이들의 화법 마냥, 무엇이든 과장하고 크게 표현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야곱은 그 틈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두 번째로, 장자권이 가진 '미래의 가치'를 계산하지 못했다. "굶어죽어간다고. 지금, Birthright - 자녀로서의 권리가 뭣이 중한디?" 하지만 '지금'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을 뒤집어보면 '내일'은 좋은 것, 유익한 것일 수도 있는데 ‘지금’에 방점을 찍는 바람에 내일의 가치를 바라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세 번째로 '명분'을 우습게 여겼다. 명분은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지킬 수 있고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눈 앞에 보이는 빵보다 더 귀중한 명분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경거망동하며 엄살 부리기, 내일의 가능성과 잠재적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생각하고 말하기, 명분을 우습게 여기고 실리만 쫓기 - 세 가지 모두, 부족을 이끌어가는 족장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진솔하고, 사나이 답고, 강건하고 용맹하지만 협상에 있어서만큼은 교활하고 냉철해야 하는 족장으로서는 부적합했다.

그 둘 사이의 일을 보면, 과연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에서의 입장에서는 그저,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이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이 되는 첫번째 사건이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태중에서부터 그렇게 한 번 이겨보려고 덤빈 첫번째 승리(?)가 되는 사건이었고.


가족 드라마가 민족의 역사가 되다

모두 알겠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가족의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역사 이야기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비천한 민족이 어떻게 크고 강성한 민족으로 발현하고 성장해 가는지 보여주는 역사의 모형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중요한 비결은 바로 -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갈구였다는 걸 보여준다.

작가의 이전글10장. 이삭은 정말 순종으로 제단에 누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