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 - 야곱과 에서(2)
앞선 글에서 에서는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가치도 모르고 장자로서의 자질도 부족한 사람이라며 비난했었다. 하지만, 에서가 장자로서 함량 미달이었더라도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을 가로채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잘못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일을 설계한 것은 바로 어머니라는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지만, 리브가에게 야곱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아버지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들이 안쓰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태중에서 예언의 말씀을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예언의 말씀대로라면 야곱이 더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기에 야곱에게 좀 더 마음이 기울지 않았을까.
또 하나의 문제는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이다. 리브가는 엘리에셀과 그의 낙타들에게 물을 길어 먹일만큼 적극적인 여인이었고 엘리에셀을 따라 다음 날 아침에 만국의 어미가 되는 길을 찾아 바로 나설만큼 주저함이 없던 성격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엘리에셀이 사기꾼 내지, 노예 상인이었더라면 어쩌려고 따라나서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삭은 아버지가 벌인 제단 위에 자신의 몸을 드릴만큼 순종적인 사람이었거나 아버지에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일을 겪은 사람이다. 비골이 우물을 갖고 어깃장을 놓을 때에도 맞서 싸우기 보다는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팔 정도로 유순한 사람이었다. 흉년을 만났을 때에도 가나안 땅에서 묵묵히 버틴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신에게 위험이 될까 싶어 '이 여자는 내 아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 소심하다 못해 비겁한 성격이었다. 에서가 장가를 가는 일에도 이삭은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에서가 사고를 쳐서 어딘가에서 여자를 둘이나 만들어왔음에도 근심만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삭은 자신이 갖지 못한, 하고 싶은대로 거침없이 행동하고 싸나이다운 에서의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자 간에는 끈끈한 정이 쌓였을지언정,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가 멀어졌던 것 같다.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도 대화 한 마디 없이 - 이삭은 이삭대로, 리브가는 리브가대로 저마다의 꼼수(?)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에서는 리브가에게는 일언반구 없이, 족장 이취임식을 거행(?)하려고 하고 리브가는 그것을 어깃장을 놓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긴, 리브가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현실 정치로 앞당기려는 조급함 때문에 이번 일에 개입했을 수도 있다.
어느 편이든, 부부가 상의를 했어야 하는 부분이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선은 만들어 주었어야지. 그 결과, 큰아들은 ‘아버지가 죽고 나면 동생을 죽여버리겠어.’라며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리고 작은 아들은 자기가 죽기 싫어 아버지 곁을 떠나게 되는 비극이 벌어지게 되지 않는가.
야곱이 이런 도발이 가능했던 이유는 - 이삭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서 '눈이 멀었다'는 표현은 '분별력을 잃었다' '영적 감수성이 떨어졌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삭 또한, 족장과 아버지로서 분별력을 잃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그래서 야곱의 어설픈 변장과 연기에도 그만 깜빡 넘어갔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잡았냐?" 그렇지, 사냥을 해서 사냥감을 얻어오는 시간과 우리에서 염소를 잡는 시간은 비교하기도 힘들만큼 차이가 나겠지마, "여호와께서 빨리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는 한 마디로 넘어간다.
또, 고기 맛은 어떤가. 이삭이 먹고 있는 것은, 맨날 먹던 염소 고기 아닌가? 그 맛을 못 알아본다는 것은 이삭은 미각도 무뎌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 이것이 결정적인데… 목소리를 못 알아듣는다. 사실, 완전히 속은 것은 아니었고 몇 번의 위기도 있었다. "내가 너를 만져보고 네가 정말로 에서인지 확인할 수 있게 가까이 오너라" 이삭이 가까이 가니 (변장한) 야곱의 팔을 만지고는 에서인 줄 알았다. 혹자는 근동 지역의 염소 털가죽과 사람의 피부는 구분하기 힘들다며 이삭 편에서 변명하기도 하지만, 사람 살갗과 짐승의 가죽도 구분하지 못하는 유목민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이삭은 눈만 멀었던 것이 아니라, 미각, 후각, 청각, 촉각이 모두 멀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네가 정말 에서냐?'라며 찜찜해 했지만 - 아니, 그렇게까지 의심스러웠으면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라도 확인을 해야지.
스멀스멀 올라오던 의심은 이삭의 식욕과 리브가의 요리 때문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삭은 야곱이 가져온 요리를 먹고 마신다. 염소 두 마리를 잡아 만든 요리라고 하는데 - 양이 조금 밖에 나오지 않는 특수부위였을 거라 생각해 보아도 꽤 많은 양을 먹고 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중에 실낱같이 남아있던 모든 의심도 다 날아가버렸을 것이다.
지도자가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 자신의 분별력이 부족한 탓이다. 이건, 누가 뭐라해도 지도자의 잘못이다. 눈이 멀고, 귀가 멀고, 입맛도 무뎌졌던 이삭은 이제 족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때였던 것이다.
우리는 야곱이 매우 현실적이고 물질적이며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이해한다. 물론, 야곱의 일생 중에 그런 모습이 여러 번 나타나긴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을 탐낸다던가, 가문의 정통성을 갖겠다는 정치적 야심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는 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말로 해 주는 축복' 하나 보고 덤벼들었다가 야곱의 말처럼 '저주나 받고 쫓겨날' 위험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건 실리적으로 계산해 보아도 그렇게 좋은 수가 아닌 것이, 말 잘 듣는 차자의 자리를 유지하다가 자기 몫을 받아 독립하는 것이 훨씬 안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야곱은 자신의 목숨과 안정된 지위를 걸고 이런 속임수를 썼던 것일까.
야곱은 형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일을 벌였던 것은 아닐까. 전에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기고 보여준 쿨함을 다시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작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 엉엉 울면서 '남아있는 축복은 없습니까, 내게도 축복을 주십시오.'라고 하는 장면을 보고 아차, 싶었을 것이다. 거기에, 전에 장자권을 넘긴 것까지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자신을 죽이려고 벼른다는 얘기까지 듣고나니까 오금이 저려오는 거지.
두번째는 아버지의 축복에 진짜,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대한 집착이 엄청 강했던 것이다.
하긴, 당시의 사람들은 한 사람이 내려줄 수 있는 축복에는 '총량'이 있다고 믿은 것 같다. 마치, 장자에게 주고 남은 것만 차자에게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이삭이 에서를 먼저 축복한다면 자신에게는 부스러기 밖에 남지 않겠다, 그러면 나는 정말 아무 복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과감하게 나섰을 수도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내려주는 축복에 대해 훨씬 더 진지하게 생각했기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가로채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아버지의 전 재산을 제 몫으로 받아 누리고 있다가 동생이 주는 선물에 흡족해 하면서 동생을 맞이했다는 후일담에 따르면, 에서가 야곱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음에도, 야곱은 빈손으로 집을 떠난다. 내가 그였다면, ‘아버지, 축복도 좋지만 당장 손에 돈이라도 쥐어 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장자의 권리와 아버지의 축복을 모두 손에 넣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원한을 품은 형과 혈혈단신의 몸뚱아리 뿐이다. 야곱은 보장되지 않는 먼 미래의 번영과 약속을 위해, 오늘의 안정을 스스로 박차고 길을 나섰다.
이로 보건대, 야곱은 실리적인 사람이기에 앞서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내일에 대한 야망이 오늘 누릴 것에 대한 욕망보다 큰 사람. 그렇기에,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여가며 ‘보장되지 않은’ 축복을 갈구했다.
그는 잘못된 행동을 하여 고생을 자초한 면은 있어도, 적어도 예언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눈앞의 이익보다 보이지도 않는 예언이 성취될 것을 믿으며, 그 축복을 찾아 떠날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장자로서의 자격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