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야곱은 어떻게 하나님을 이긴 자가 되었나?

이스라엘이 된 야곱

by 이진석

평화의 사절을 군대로 맞이하는 에서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야곱은 고향 땅 입구, 셰일 땅에서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한다. 심부름꾼을 보내어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전하는 말이 야곱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지금,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서는 왜 칼을 찬 400명의 군대를 데리고 야곱에게 다가왔을까.

가설1. 심부름꾼과 야곱이 과민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에서와 야곱 모두 유목민의 족장이었고, 광야에서 재산과 가족을 보호하는 것은 기본이다. 400명의 '무장한' 무리는 험악한 지역을 여행하는 유력 족장의 필수적인 경호대였을 수 있다. 야곱은 당시, 형에 대한 죄책감과 과거의 두려움 때문에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을 것이다. 하인의 보고는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야곱의 공포 심리가 투영되어 "에서가 나를 치러 온다"는 식으로 오해되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인원이 지나치게 많았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치러 갈 때 동원한 병력이 318명이다. 한 나라(도시 국가에 불과하지만)를 치러 가는 병력보다 많은 400명을 동원한다는 것을 일상적인 경호 업무라고 보기는 힘들다.

가설2.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준 것은 아닐까.

에서는 이미 에돔 족속의 우두머리로서 큰 권세를 가진 상태였다. 어릴 때와는 달리 자신이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음을 과시하고, 야곱으로부터 존경(또는 복종)을 받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가볍게 표현하면, ‘오냐, 일단은 받아주겠지만 다시 까불면 너는 죽는다.’는 정도의 느낌이랄까. 다만, 야곱을 만나 끌어안고 울며 진정으로 환대하는 모습을 보건대, 적어도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놓고 보인 것은 아닐 것 같다.

가설3. 진짜로 야곱과 그의 가족을 치려고 했던 것이다.

야곱이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챈 후, 에서는 야곱을 죽이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창세기 27:41). 20년이 지났지만, 구원이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다. 어쩌면, 저런 인사말로 과거의 감정이 해소될 거라는 야곱의 발상 자체가 너무 나이브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야곱을 만난 에서의 반응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헷갈린다.


수습하느라 바쁘신 하나님

그럼에도,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예상치 못한 에서의 따뜻한 반응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칼을 차고 죽일 듯이 달려와서는 막상 야곱을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눈 것은 그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장인이자, 악덕 고용주인 라반으로부터 도망갈 때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4명의 처첩과 11명이나 되는 자식들, 양과 염소 떼를 끌고 도망가던 야곱은 당연하게도(!) 유목 부족의 추격대를 따돌릴 수가 없었다. 금처럼 부피가 작은 자산으로 바꿔두고 잽싸게 튀었어야 하는데 가축떼를 다 끌고 다니는 자가 꼬리를 밟히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야곱과 라반이 만나기 전,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라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보내주라’는 지시를 받은 것. 그래서 라반은 자신의 드라빔만을 요구하였고 그 외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바로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은 에서를 만나는 과정에서도 반복된다. 에서의 마음을 돌린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다. 물론, 야곱이 먹인(?) 뇌물도 효과를 발휘했겠지만 야곱을 죽이면 어차피 제 것이 되기 때문에 에서의 마음이 풀어진 것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다고 보는 편이 옳다.

이쯤되면, 사고는 야곱이 치고 하나님은 뒷수습하시느라 바빠보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도 이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고는 내가 치고 수습은 하나님이 하시고. 아니면, 평소에는 대면대면 하게 지내다 내가 급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는 또, 잊어버리고.

한편으로 감사하고 죄송하지만, 금새 잊어버리는 건망증과 다음에도 또 그렇게 만드는 뻔뻔함까지 두루 갖춘 나는 정말…


하나님을 이긴 것인가, 하나님이 이긴 것인가

야곱이 한 일이라고는 밤새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한 것 뿐이다. 그것도 자신이 원해서 한 싸움이 아니고 누군가, 자신을 붙잡았고 자신은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씨름”이라고 되어 있지만 - 아마 지금의 레슬링이나 종합격투기 비슷한 ‘개싸움’이었을 것이다. 생사를 건, 룰도 매너도 없는, 개싸움.

한밤중에 맞붙어서 새벽이 올 때까지 싸웠다니 한 3~4시간 싸웠다고 봐야 하나? 그런데, 그렇게 오래 싸울 수 있나? 훈련된 격투기 선수도 3분씩 4라운드 뛰는 것이 고작인데. 그래서 이것은 실제 물리적인 씨름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은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되는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통성기도 열심히 한다고 환도뼈가 부러진다? 이교도적인 자해 의식이 없다면야, 이 또한 모순적인 부분이다.

그렇기에 이 사건을 단순히 처절한 종교 행위에 대한 은유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한 사람이 야곱을 붙잡아 싸움을 걸었다. 밀고 당기며 때리는 과정에서 야곱은 지쳐갔고 숨을 고르는 중에 한 가지를 깨닫는다. 나는 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를 이기려 하지 않고 꼭 내 힘만큼만 대응해 온다. 그러다, 그가 나의 고관절을 쳐서 탈골시킨다. 소위, 파워존이라고 불리는 대퇴부와 복근을 이어주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야곱은 이제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종합격투기에서도 이런 경기 불능 상태에 처하면 TKO패가 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결정타를 맞고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이겼다고 하신다. 이건 뭐, 실컷 두들겨 패던 상대가 갑자기 악수를 청하며 ‘네가 이긴 걸로 하자.’하는 상황이랄까. 되려 승자의 여유를 부리거나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야곱 또한 하나님을 진짜 이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보다 강력하며 축복을 줄 수 있는 권위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였기에 축복해 달라고 매달렸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나는 장면을 보면,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예물을 바치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지 않는가. 당신은 저보다 더 크고 강한 분입니다. 그러니 예물을 받으시고 복을 주십시오.


패배를 시인하는 순간, 승리하게 되는 역설

난, 늘 이 장면을 보면서 사건의 전개가 어긋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니, 밤새 목숨을 건 싸움을 시켰으면 문제를 해결해 주고 가야지, 이름 하나 지어주고 축복 한마디 해주고 이대로 간다고? 적어도, ‘너희 형님 만나는 데까지 같이 좀 가서 너를 못 건드리게 해주마’,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얍복강의 씨름은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야곱에게 남겨진 것은 피와 땀에 절고 깨지고 멍들었으며 절뚝이게 된 다리 뿐. 얍복강의 씨름은 야곱에게 상처만 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야곱의 상처 입은 모습은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에서의 기억 속의 야곱은 자신의 꾀나 힘으로 자신을 이기려고 덤비는 되바라진 녀석이었다. 에서의 상상 속의 야곱은 타향에서 운좋게(?) 성공하여 금의환향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서의 눈앞에 나타난 동생의 모습은 피와 땀에 절고 멍들고 상처 입은 절름발이였다. 그건, 야곱의 외형 뿐만이 아니었다. 철저히 겸손하고 의존적인 자세로 형을 대하며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야곱이 에서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렇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상대의 자비를 구하는 자세를 갖는 것. 그것이 그날 밤 처절하게 싸운 이유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언의 말씀과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임을 배운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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