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야곱은 왜 에브라임을 더 축복했을까?

팔을 어긋맞겨 축복한 이유

by 이진석


개명을 해도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환도뼈를 위골시킨 것은 그의 정체성이 바뀐 장면이라고 논평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 것은 아니다. 슬프게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여러 장면에서 야곱은 여전히 고집 세고, 편협하며, 속물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장, 에서의 호의를 거절하고 혹시나 모를 보복을 의심한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듣고 멈춘 세겜 땅에서 주저앉아 버린다. 고명딸이 겁탈을 당했는데 분노하기는 커녕, 보복당할까 웅크려 있는다. 라헬을 잃자 요셉만 편애하며 가정을 갈라놓는다. 앞서, 이삭을 가리켜 ‘분별력을 잃은 족장’이라며 비난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의 추태이다.

야곱의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을 향해 출발한 것 뿐임을 보여준다.


편애와 비교의식 또한 대물림된다

거기에 대해 풀어내고 싶은 소재는 많지만, 식량을 구하러 간 10형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바로, 요셉을 잃은 후, 베냐민에 대해 집착하는 장면 말이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장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도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차별받고 자란 야곱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도 아들들을 차별하며 키운다. 자신이 진짜 사랑한 아내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요셉만을 사랑한 것. 베냐민을 낳다 난산을 라헬이 죽었기에 베냐민은 광해처럼 ‘제 어미 살을 찢고 나온 놈’이라며 미움받았겠지.

그러다 요셉이 죽은 (줄 알았던) 후에야, 베냐민에게 집착을 보인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온 가족이 기아에 허덕일 때도, 둘째 아들 시므온이 이집트에 억류되어 있을 때도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려 한다. 베냐민을 보내 이집트 국무총리를 알현하기만 하면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된 요셉이 간첩 혐의를 씌워 시므온을 억류시켜 두고 다른 형제에게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명한다. 베냐민을 데려와서 보여주면 시므온을 풀어주겠다는, 어렵지 않은 조건이지만 야곱은 그 조건을 따르지 않는다.

10명의 아들 중에 왜 하필, 시므온이었을까. 10명의 아들 모두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지만, 특히 시므온은 미움 받는 아들에 가까웠다. 평소 성품이 잔인했는지 장난삼아, 소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들기도 했으며 디나를 더럽힌 복수라는 이유로 세겜 땅 남자들을 칼로 쳐 죽인 사내였다. 유약한 아버지 대신 여동생의 복수를 해 준 사나이였지만 그 또한, 야곱에게 자격지심을 불러 일으켰을 수도 있다. 마지막 축복에서조차 ‘나는 그들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겠다’며 선을 긋는다.

이 장면은 요셉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께서 가장 미워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실 수 있습니까?’ 하지만, 야곱은 최대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 견디지 못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베냐민을 보낸다. 르우벤이나 시므온은 아버지에게는 끝까지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팔을 어긋 맞겨 축복하기

도망자에서 거부가 되었다가, 주변 민족의 공공의 적이 되어 다시 유랑민이 된 야곱. 그는 결국 이집트에서 눈을 감는다. 파라오 앞에서 자신을 “험악한 세월을 보낸 자”라 소개했듯, 이제 선조들의 곁으로 돌아갈 날만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러한 때,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야곱을 찾아온다. 야곱은 그들을 손자가 아닌 아들로 입적시킨다. 이는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갑절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 생긴 아들들'에게 축복하면서 야곱은 말한다. “나의 이름과 이삭과 아브라함의 이름이 이 아이들에게서 살아 있기를, 이들이 땅에서 크게 번성하기를.”

그런데 문제는 손의 위치다. 요셉은 맏아들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 쪽에, 둘째 에브라임을 왼손 쪽에 두었지만, 야곱은 의도적으로 손을 교차시켜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는다.

요셉이 손을 바로잡으려 하자, 야곱은 말린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도 한 민족을 이루어 크게 되겠지만, 그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나도 안다”는 단순히 므낫세가 장자임을 안다는 의미를 넘는다. 오히려, 험악한 세월을 지나온 야곱이 이제야 진실로 깨달은 삶의 이치, 하나님의 섭리, 축복의 본질을 담은 고백처럼 느껴진다.

실은 이 말씀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 그의 어머니 리브가가 하나님께 받은 예언이기도 했다. “형이 아우를 섬기게 될 것이다.” (창 25:23) 그 말씀은 결국 야곱 인생의 문을 열고, 그의 유언 속에서도 반복되며 닫히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야곱은 그 약속을 믿지 못했다. 아니, 믿었다 해도 기다리지 못했다. 형에게 장자권을 헐값으로 샀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채야 했으며, 그 결과 형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쳤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14년을 무보수로 일해야 했고, 그 외삼촌을 속여 재산을 모았다가 쫓기듯 도망쳐야 했다.

돌이켜 보면, 굳이 인간의 손에서 축복을 억지로 취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이삭이 에서에게 모든 축복을 쏟아붓더라도, 하나님의 손이 어긋맞게 축복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축복을 탐내어 형제의 것을 빼앗고, 거짓으로 얻은 복은 결국 고단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하나님의 손이 가리키시는 때를 기다리지 못한 대가였다. 결국, 인생의 끝자락에서야 야곱은 비로소 깨달은 듯하다.


축복은 제 주인을 찾아간다

인생을 살아본 현자들은 알고 있다. 예언의 말씀은 결국, 부메랑처럼 돌고돌아 다시 그 사람을 찾아가며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악다구니를 쓰며 왕권을 놓지 않으려 했던 사울은 결국 길보아 산에서 생을 마친다. 아합은 전쟁에서 살아볼 요량으로 변장했지만 예언을 피하려는 행동 자체가 예언을 성취하는 도구가 되어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전사한다. 지구의 끝, 다시스로 가는 배(船)를 타고 도망가던 요나는 물고기 배(腹)에 실려 사명의 장소로 소환된다.

반면, 다윗은 사울을 죽여서 자신의 고통을 일찍 끝내려 하지 않았고 세례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다 예수께 자리를 비켜주고 자리를 떠났다. 예수님은 12개 연대 이상의 천사를 동원하지 않으시고 고통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드셨다.

어느 편이 진정한 승리자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언의 말씀에 개입하거나 거스르고자 발버둥친다. 리브가나 야곱은 지금이 자신이 개입하여 예언의 성취를 앞당겨야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돌아온 것은 ‘험악한 세월’이었다.

그러기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위에 교차된 그의 손은, 그의 인생에 대한 깊은 회개이자, 이제는 억지로가 아닌 믿음으로 전하는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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