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우벤은 왜 아버지의 침상을 더렵혔나?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유목 사회에서 장자가 갖는 의미와 권리는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머니가 누구냐에 상관없이 장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신 21:15-17)
그렇지만 성경에는 장자의 자리를 잃어버린 몇 사람이 있다. 아담의 장자 가인부터 팥죽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가 대표적이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의 맏이, 르우벤도 장자의 자리에서 내쳐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장자들을 미워하시며 차자를 세우시는지, 또 장자들은 하나같이 모자라며 세속적인 인물로 그려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오죽하면, 하나님은 ‘장자 컴플렉스’가 있으신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우리 역사에서도 적장자 계승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적이 더 많고 전래동화에도 늘 셋째가 복을 받긴 하더라.)
나는 개인적으로는 르우벤이 에서보다 더 몹쓸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버지의 첩이자 자기 이복 형제의 어머니를 간음한 일은 동서고금에도 보기 힘든 패륜이기 때문이다. 결국 르우벤은 야곱으로부터 축복 한 줄 듣지 못하고 끓는 물 같은 놈이라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놈이라고 비난만 받고 만다. 맞다. 용서받지 못할 놈이다. 야곱이 왜 돌을 던져 죽이지 않았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나도 그렇게 파렴치한 놈이고 돌 맞아 죽을 놈이라고만 생각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가 조금씩 이해되기도 했다. 인간사 희노애락에 젖어서 공감 능력이 높아져서였을까, 죄에 찌들어 살면서 나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그렇게 르우벤 입장에서 변명을 하자면,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거기에 걸맞는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그의 범죄는 그런 결핍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르우벤이 사랑받지 못한 것은 그의 어머니 레아가 사랑받지 못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서 보듯, 야곱이 레아를 맞이하는 과정은 한편의 사기극이었다. 7년을 뼈빠지게 고생해서 라헬과 결혼한다고 첫날 밤을 치르고 나니 내 옆에 누워있는 여자가 못 생긴 레아였다니, 야곱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냐. 억지로 결혼을 하고 났더니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에게서 먼저 아이가 생기고 말았다. 르우벤은 결국, 계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환영받지 못한 아이에 불과했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도 섭섭한 일이겠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 한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연민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밀 거두는 시기, 들에 나가 일을 하다가 최음제로 쓰이는 합환채를 구했을 때 그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갖다 준다. 밀 거둘 때는 5월 하순에서 6월쯤 된다. 그때 쯤이면 합환채는 이미 잎과 열매가 모두 말라버린 상태라고 한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10대 초반이었을 아이가 다 말라버린 합환채를 알아보고, 깊이 박힌 뿌리까지 캐내어 어머니를 갖다 준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린 녀석이 되바라지게도 최음제를 알아보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어머니의 성적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약을 구해다 준 것이라고 본다면 눈물 겨운 효심이 아닐 수 없다.
‘시앗 싸움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만든다’는 말처럼 자매지간이었던 레아와 라헬은 끊임없는 시기로 서로를 공격한다. 남편의 사랑을 놓고 경쟁하던 그들은 하녀들까지 씨받이로 동원하여 자식 수를 갖고 경쟁한다. 야곱은 자수성가하기 위해 밤낮으로 돌아다니느라 몰랐겠지만 (아니면, 알아도 모른 척했겠지만) 야곱의 가정은 반목과 시기, 질투로 이미 레아 진영(?)과 라헬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자식을 많이 낳은 레아가 더 유리해 보였지만, 라헬에게는 야곱이라는 가장 큰 후견인이 있었다.
그 팽팽하던 힘의 균형은 어이없는 일에서 끊어지고 만다. 라헬이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 끝에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결국 오래 살아남은 레아가 승리한 것이다. 라헬의 죽음에 대해 야곱과 레아, 다른 가족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야곱이 느꼈을 상실감과 슬픔이 얼마나 심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르우벤의 간음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고 절망에 빠진 야곱이 가장 무력했을 때 일어났다. 르우벤의 눈에 야곱은 이제 이빨 빠진 사자에 불과했다.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한 행위는 단순히 성욕을 주체 못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도전이자 우두머리의 지위를 찬탈하려는 잔인한 복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야곱은 르우벤의 생각보다 더 무력했다. 야곱은 르우벤의 행위를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을 쫓아냈더라면, 맞서 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늙은 아버지는 거세당한 개마냥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야곱은 가장이었지만, 마음 붙일 데가 없었다. 요셉. 그 아이 하나만이 라헬이 이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이었다. 흔히,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을 요셉 개인의 인격적 결함에서 찾지만 요셉에 대한 애정은 곧 라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자식들에게는 그것이 더 못 견딜 일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죽이려고 할만큼 요셉을 증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곱의 무력함과 요셉에 대한 그의 애정을 마주하면서, 르우벤은 자신이 뻗었던 복수의 칼을 거두는 반전을 보인다. 그의 패륜적 행위가 결국 아버지에게 또 다른 상실과 고통을 안겼다는 죄책감과 뒤늦은 연민이 발동한 것이다. 요셉을 죽음에서 구해 아버지에게 돌려주려 하고,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걸었던 행위는 바로 그 속죄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야곱은 그런 르우벤을 끝내 용서하지 못한다. 요셉의 품에 안겨 죽으면서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지만 그 탁월함을 떨치지 못할 것” 이라며 사실상, 장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해 버린다.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아버지를 향한 증오로 자라나 패륜으로 이어졌다. 패륜에 대한 야곱의 무력함은 다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와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레 아버지에게 사죄의 손을 내밀지만, 야곱은 그를 끝내 뿌리친다. 그는 끝내 사랑받지 못한 장자이며 용서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아버지께 사랑받지 못한다 생각한 아들은 패륜을 저지르고, 아버지는 패륜을 저지르고 자신에 도전한 아들을 마음으로 받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야곱 앞에서 칼이라도 물고 죽었더라면, 하직인사라도 하고 야곱의 장막을 떠났더라면, 압살롬이 다윗에게 그러했듯이 연민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집트를 나서 약속의 땅을 앞두고 있을 때, 모세의 축복을 읽으면 그때 그가 뻔뻔하게 살아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신명기 33장 6절의 르우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을 읽으며 가슴 한 켠이 저릿해졌다. 야곱으로부터 장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장자. 종교적 지위는 레위지파에게, 정치적 권력은 유다지파에게, 물질적 부는 요셉, 스불론 지파에게 빼앗겼으며 아버지로 축복 한 마디 받지 못한 르우벤에 대한 작은 회복의 말씀. 비록,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아들이지만 그래도 죽지 않기를 바라며 열두 지파의 한 지분을 차지하고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젊은 시절의 과오에 대한 용서와 회복의 말씀. 너는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네가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번성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의 명령과 축복이 너에게 이루어질지어다.
용서와 회복의 선언이 너무 늦게 이루어진 감은 없지 않다. 하지만 수백 년 후에라도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 살아남아 구원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고등학생 시절, 친구는 연습장을 새로 사면 새 연습장 표지에 이런 문장을 써 놓고는 했다. ‘후회 없는 삶을 살자’ 공부 열심히 하자, 뭐 그런 의미였겠지만 감수성 예민한 시절이라 그랬는지, 나는 그 문장에 맘을 빼앗겼고 그 친구가 보지 못하는 곳에 나도 따라 써 놓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게 단순히 ‘공부 열심히 하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성실하지 않아서만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세상 사는 누구나 후회를 하고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후회 없는 삶을 살자’는 다짐보다는 ‘후회 - 그거라면 나도 좀 있지- Regrets, I've had a few’라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랫말이 더 와 닿는다.
그래 어쩌면 살아가는 일은 후회를 쌓아가는 일 같기도 하다. 지나고 나면 늘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다. 하지만, 후회로 인해 자신과 타인을 원망하며 무기력하게 주저 앉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르우벤에게 마음으로 강요했던 ‘죽음으로 자신의 후회를 증명’하는 짓도 바보같은 짓이다.
나의 이 고난이 내 지난 날 죄악에 대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먼 훗날에도 회복의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