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거절, 지도자의 무게를 아는 자의 용기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거나 개각이 단행되면 인사를 두고 많이들 시끄럽다. 국회에서 인사 청문회가 이루어지고 후보자의 신상이 탈탈 털린다. 질의하는 의원들에 대해 ‘저 양반은 저런 것까지 어떻게 알았지?’하며 감탄하기도 하지만, 어떤 후보자들의 경우에는 저런 도덕성과 저 정도의 전문성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후보자들의 수준에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질문하는 국회의원들도 사실, 자신의 허물은 제쳐두고 남을 정죄하는 모습 또한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다들 왜 ‘국민의 뜻’을 팔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너는 얼마나 잘났냐, 네가 한 번 해 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 걱정 마시라. 나는 내 꼬라지가 그런 줄 알고 높은 자리를 마다할 터이니.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전문성과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쓸 터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미치는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자리는 지역과 사회, 나아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작지 않다. 그러기에 거기에 앉겠다는 사람은 그 자리의 무거움을 알고 스스로에게 ‘나는 이 역할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스파이더맨의 주제를 뒤집어 말하면 ‘큰 책임에는 큰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성경 속 모세의 모습은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할만한 부분이다.
모세가 이드로의 양 떼를 돌보며 호렙산에 이른다. 하나님의 사자가 떨기나무의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다. ‘나는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구해주려고 내려왔다. 나는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해 내고 그들을 넓고 좋은 땅으로 인도하여 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려고 하니,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과 모세의 거절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Who am I to appear before Pharao? Who am I to lead the people of Israel out of Egypt?’ Who am I? 내가 누구인데 ~을 하느냐. 다시 말해, ‘내 까짓게 뭐라고…’라는 말이다. 이건 한편으로 자기비하라고 볼 수도 있다.
모세는 무려 40년 동안 - 전생의 1/3을 궁궐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또한, 현재 왕족과도 (좋은 식으로든 나쁜 식으로든) 인연이 닿아 있어 협상할 수 있는 위치이다.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의 화려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히브리 민족들에게 뒷배가 되어 줄 수 있는 재야 인사가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힘, 인맥을 과소평가하며 거세당한 개 마냥 ‘내 까짓게 무슨…’하며 찌그러져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이 말은 지나친 자기비하만은 아니다. 먼저, 그는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지배계급인 이집트 감독관을 계획적으로 죽여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며 추격자의 위협은 멀어졌지만, 누가 또 지켜보고 있을까 싶어, 사람의 눈길을 피해 광야로 숨어들지 않았던가. 타인의 위협 뿐 아니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업보를 평생 새기고 살아야 했던 것처럼 그 또한 그날의 살인을 평생 지고 살았을 것이다. 양떼를 치며 초원 너머에 펼쳐진 사구를 바라보며 자신이 시신을 묻었던 모래구덩이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다음으로, 그는 정치적으로도 핍박을 받는 중이었다. “파라오가 모세의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출2:15)” 예전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파라오의 왕자가 사람을 죽였다고 사형에 처해지는지 의아했었다. 물론, 파라오였다면 이 정도의 살인은 허물도 아니었을 것이다.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지위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지만, 권력 계승 구도에서 밀려있으며 나아가 현재 권력에 대한 작은 위협이라도 된다면 - 이런 스캔들은 합법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구실이 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는 목자로 40년을 살았기에 과거의 지식과 경험을 보장할 수 없었다. 고대 근동에는 농경과 목축 외에는 별다른 산업이 없어서 목자들이 흔한 직업이었겠지만 - 어느 문화권에서나 목축은 ‘인생 막장 직업’이었다. 그들은 더위와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 박봉과 들짐승과 강도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 와중에 물이나 목초지를 찾고, 날씨를 분간하며 짐승을 먹이고 번식시키며 털을 깎는 기술은 익혔을지라도 논리적으로 협상하고 수사적인 연설을 하는 정치적 수완은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다 배웠었지만 40년 동안 잊어버리고 살았을 것이다. 양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잊어버려 스스로를 입이 둔한 자라고 할 지경이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했는가? 다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나 하다못해, 말을 잘하는 아론을 직접 시키면 되지 않은가.
우선, 한때 이집트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신분이 갖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는 그의 지위가 높았다는 점. 요세푸스는 ‘차기 파라오가 될 수 있는 높은 지위’라고 보고 있지만 - 그는 공주의 양아들 - 파라오의 외손주이기에 왕위 계승 순위에서는 한참 밀려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는 왕궁에서 파라오의 외손자로서 무시할 수 없는 지위였을 것이다. 파라오가 모세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것은, 왕궁에서 오가다 몇번 만났던 왕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째는 그가 가진 수완 때문이었다. 모세가 왕자 시절에 배운 여러 지식들은 이스라엘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정치, 행정, 종교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꼭 필요한 자질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그토록 거절했음에도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신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민족을 향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모세가 왕궁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거라 생각하는가. 여러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하는 모세를 비춰준다. 그런 상상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세는 40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을 키우고 있었다. 이집트 감독관을 때려죽인 것도 민족에 대한 잘못된 열정 때문이었다. 히브리서에는 ‘왕궁에 있는 안락함보다 동족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신분, 학식, 열정 모두 고루 준비된 그는 출애굽을 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하지만 모세는 끝까지 개개고 저항한다. 처음에는 모세의 겸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느 후견인보다 더 든든한 분이 밀어주시는데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또,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는데 감히(!) 거절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 역시,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라는 견해에 적극 동조했다.
하지만 그는 겸손 때문에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외적으로는 부족함 없어 보이지만, 모세는 지도자 자리의 무게를 깊이 알고 있었고 자기 내면의 가난함을 누구보다 깊이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도 재미있는 것이, 그가 말을 못한다 하면 대변인을 지정해 주셨다.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을 염려하자 이적 3종 세트를 넣어주신다. 꼭 그가 거절하지 않았어도 동역자를 보내주시고 능력을 주셨겠지만 이런 지원을 보여줌으로써 모세의 변명과 거절이 옹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 영광에 대해 설교하신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삶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이 얼마나 큰 지, 하나님이 어떻게 후원해 주시는지 설교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그 영광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종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괴이한 퍼포먼스로 미친 놈 취급을 받았던 이사야, 밤낮 울고 다녔던 예레미야, 계집아이 농간에 목이 떨어져 죽은 세례 요한 등등.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당신의 종이 되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손가락질과 무시, 굶주림과 헐벗음이었다.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 보아도 남는 장사는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을 내몰고 있는 길이 그런 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이집트에 각종 재앙을 내리고, 바다가 갈라지고 이집트 군대를 쓸어버릴 때의 감격은 잠깐이었다. 춥고 더운 광야길은 길었고, 날마다 하루치 양식만 갖고 살았으며 그마저도 물린다며 투덜거리는 백성들의 불평에 시달려야 했다. 밖에서는 이민족이 습격하고 안에서는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고 심지어 2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리를 만들어 자신을 탄핵하기도 했다. 심지어 평생을 바친 사업의 열매를 누려보지도 못한 채 느보산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오늘 그의 거절을 묵상하면서 그의 거절이 얼마나 사려깊은지, 얼마나 진실된 답변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망대를 세우기 전에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였던 사람이었다.(누가복음 14:28) 그러기에, 나는 그의 거절이 무례하다, 교만하다, 비겁하다 돌을 던지지 못하겠다.
대학생 때에는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뭣도 모르면서 하나님께 내 생을 드리겠다 고백한 나의 헌신이 못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