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레위지파는 누구인가?
요즘은 좀 조용해지기는 했는데 아직도 ‘종교인 과세’에 대한 찬반 대립이 치열하다. 아울러, ‘교회 세습’과 같은 이슈들로 교회 안팎이 시끄럽기도 하다.
교회 세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가장 많이 근거로 삼는 것이 레위인의 직책도 세습되었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곧 구약의 레위인 같은 직책이니, 그들의 생계도 보장해 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고 교회도 세습하게 해 주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보는 논리이다.
그에 비해 목회자들을 ‘창백한 하얀 손을 갖고 성도들 주머니나 털어먹는 파렴치한 부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목회자들에게 투사되었기 때문이긴 하겠지만, 그들의 눈에는 목회자나 레위인 모두 너무 많은 특혜를 누린다는 시각이다.
나는 문득, 초창기 종교인들 - 레위 지파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들의 삶은 특권이었을까, 희생이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레위인에 대한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 ‘이건 너무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을 했었다. 세금으로 만든 좋은 옷을 입고 세금으로 만든 성막에서 살면서 성막을 옮긴다거나, 집기 몇 개를 옮긴다거나 하는 쉬운 일 몇 가지를 하고 백성들이 갖다주는 십일조로 놀고 먹으며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제사장직이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임이니라.”는 말씀처럼 모든 장자를 당신께 속한 자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 종교적인 장자로 삼으신 것이 레위지파였다.
이것은, 출애굽의 지휘부였던 모세와 아론의 지파였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측근을 등용했다는 의미보다는 - 레위 지파와의 연대가 강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모세의 정책에 가장 잘 따라주었고 모세의 어려움에 대해 그래도 가장 동조해 주었던 지파였다.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지파로 구별된 결정적 사건은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아론과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자 모세가 백성들 중에 외친다. “누구든지 여호와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나아오는지라”(출 32:26) 그리고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우상 숭배자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칼을 들고 3,000명을 죽였다. 피의 살육이 벌어진다. (출애굽기 32:29) “각기 자기 아들과 자기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때부터 레위 지파는 여호와께 헌신한 지파로 인정받고, 성막 봉사와 제사 직무를 맡게 되는 기반이 마련된다.
제사장 역할의 시작이 반란의 진압 부대였다니. 형제를 죽인 대가였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레위지파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선택받은 지파라는 상징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후에 가나안에 정착해서 각 성읍으로 흩어진 레위지파들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예배를 집전하는 - 공동체의 영적 중심이자, 마을의 어른 역할을 감당했다. 생계는 보장되며 군대에 입대한다던가, 하는 세속적인 책임에서는 어느 정도 면제된다. 거기에 부동산 거래에 있어, ‘희년 특례법’에 적용이 되지 않기도 했다. ‘토지 거래는 희년에 다시 원주인에게 돌려주지만, 성안의 가옥은 주거용이기에 희년에 돌려주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레위인의 집은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레위 족속의 성읍 곧 그들의 소유의 성읍의 가옥은 레위 사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으나 만일 레위 사람이 무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유 성읍의 판 가옥은 희년에 돌려 보낼지니 이는 레위 사람의 성읍의 가옥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받은 그들의 기업이 됨이니라 그러나 그들의 성읍 주위에 있는 들판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지이니 팔지 못할지니라
지금도 이스라엘, 하레디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대신,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레위인들도 그와 비슷한 모습이었을까, 상상하게 되는 모습이다.
레위지파의 희생
하지만, 특권이 있으면 특별한 희생도 있어야 하는 법. 우선, 레위 지파에게는 지파 단위로 땅이 배분되지 않는다.
레위 지파에게는 목초지를 위한 약간의 땅만 제공될 뿐이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류의 최대 생산수단은 토지였다. 그래서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얘기이며 내일의 생존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근원적 불안정성' 속에 자신을 던져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직업의 영속성은 그 자체로 굴레가 된다. 일본에서는 가업을 잇는 것이 명예이자 전통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사회의 변동을 막기 위한 신분제 사회의 잔재이기도 하다. 레위인도 저마다의 꿈이 있고 나름대로의 불만도 있지 않을까. 그런 포부를 펴지도 못하고 불만을 이야기하지도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겠나.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피곤한 점이다. 선생으로서, 집 근처의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기도 조심스럽다. 밖에서 학생이나 학부모를 만났을 때를 생각해야 하니까 말이다. 일개 평교사도 행동의 제약을 받을진대, 레위인들에겐 항상 모범적인 행위를 강요받아야 하는 부담이 있엇을 것이다.
모교회의 노목사님께서 그런 회고를 들려주셨다. ‘초임 목회자 시절, 교회 문 옆에 ‘성미(?)’가 달려있으면 그 날은 먹을 게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나는 공중에 나는 새들 신세더라고.’ 철없는 고등학생 시절이라 그게 그저 낭만적으로 들렸을 뿐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그게 얼마나 피를 말리는 헌신이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도 직업을 갖고 생활비를 벌어보니, 적은 돈이라도 내가 직접 고생해서 버는 것이 낫지 다른 사람의 헌신과 희생에 기대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가슴 졸이고 피곤한지 생각한다. 특히, 개척교회 목사님들께는 성도 한 분이 교회를 떠난다는 소식이 치명적일만큼 가족의 생계와 교회의 존폐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형국이 아닐까.
물론, 고대 이스라엘에서 십일조는 종교적 의무 이전에 납세의 의무라는 성격도 있었다. 12지파의 십일조는 제사와 성막 유지에 필요한 재원과 레위인에 대한 공궤가 포함이 된다. 사사기를 보면 십일조 체계가 무너진 이스라엘에서 레위인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사사기 17:7-8)
사사기 17장은 유다 지파에 살던 레위인이 생계가 어려워져 방황하면서 생기는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그 레위인이 속한 유다 지파는 십일조 체계가 무너져 함께 살던 레위인들이 유랑민 신세가 된 것이다. 레위인 역시, 율법에 대한 전문성이 전혀 없어서 미가의 제안에 선뜻, 집안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편이든 한심하긴 한데, 레위인들의 생계가 좀 더 안정되었더라면 그들의 삶을 지켜줄 시스템이 정착되었더라면 이 지경까지 왔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목회자들은 대개 레위인을 목회자로 대입하여 적용하신다. 그래서 ‘개인의 신앙을 지키고 신앙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회자를 잘 섬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신다.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현대 목회자를 구약의 레위인으로 1:1로 대입하여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학적 정당성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기에 간략히 말하면 - 출신이 다르고, 국가 체제와 시대(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였다. 반면, 우리나라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인정하지 않는 -세속국가이다. 레위인은 국가 종교 체제 내의 공직자에 가까웠지만, 현대 목회자들은 공직을 겸하며 정치에 관여하거나 국가로부터 어떤 특혜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납세의 의무를 지는 것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가르침을 지키는 일이다. 평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임을 강조하시면서, 세습으로 가문이 직무를 잇는 ‘레위인의 후예’를 자처하시는 것은 일관성이 부족해 보인다.
무엇보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목회자는 그중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특수 직분자일 뿐, 레위인처럼 성도와 하나님 사이를 독점적으로 중보하는 계급이 아니다.
레위인은 결국, 모든 성도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레위지파만이 제물을 잡고, 예배를 집전하며 율법을 해석할 수 있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형 이후,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모든 성도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제물을 드리고 혼자서도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 가운데 레위인의 희생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앞서 말한 레위인의 희생을 우리도 같이 져야 한다. 우리는 직업적 레위인은 아니지만, 레위인과 같은 직업 윤리를 갖고 직업에 임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해외 여행을 가면 모두가 민간 외교관이 된다’는 공익광고의 문구처럼, 우리는 모두 불신자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얼굴이 된다. 그래서 레위인들의 삶처럼 불신자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하겠다.
‘철밥통 공무원’으로서 하기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믿는 월급, 부동산, 아파트 등의 자산에 자신의 안전을 기대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는 이유는 - 돈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에 기대 하루하루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백성이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을 받아 누려야 했던 레위인들처럼, 여호와를 기업으로 삼아, 불안정성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레위인으로서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