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아론은 왜 면죄부를 받아 살아남는가?

금송아지 사건으로도 살아남은 아론

by 이진석

모세는 하나님께 계명을 받으러, 종교 의식법과 사회 법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갔다. 출 24:18에는 40일을 있었다고 한다. 모세는 잡다한 족속이 섞인 히브리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세우는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는 사이, 백성들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바로 황금 송아지 사건이다. 아론은 이 사건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후 레위인의 살육, 전염병과 같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제사장직을 이어간다.

아론은 왜 살아남았고, 용서받았으며 제사장직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질문1. 백성들은 왜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을까

우선,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을 찾아갔다. ‘이것 보쇼.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신을 만들어 주시오.’ 언뜻 생각하면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나를 이끌어 가는 신인데, 내가 만들어? 누가 누구의 주인이 되는 거지? 누가 누구를 창조한 신이 되는 거지? 나는 그를 만들고 그는 나를 이끌고. 인간은 이런 모순을 견딜 수 있는 존재인가. 하긴, 무신론자들은 모든 종교를 가리켜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숭배하는 모순’이라고 하겠지만 - 적어도 만드는 사람과 숭배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놓은 신을 내가 따를 수 있을까.

그런 이유들로 예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보고도 이렇게 빨리 하나님을 배신하고 황금송아지를 섬길 수 있는지. 하지만 이 구절을 오랫동안 묵상하다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심리가 납득이 되었다. 심지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설1. 신 -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처

당시 히브리인들의 출신을 생각해 보면 그토록 빠른 배교가 이해되기도 한다.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각종 건축물을 만드는 노역에 시달리며 앞 세대 이집트인들이 세워놓은 거대한 종교 기념물, 신전, 신상을 보고 살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집트의 신들은 그의 백성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준 신들이었다. 그 신들의 신민이 된다면 나 또한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비참한 노예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400여년간 침묵하시고, 결국 조금씩 하나님을 잊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은 침묵했다. 지금은 자신들을 광야로 데리고 와서는 또 사라져버렸다. 또 자신들을 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를 얻었지만 그들은 다시 버려지기 두려웠다. 그래서 신을 만들어서라도 안정을 얻기를 원했다.

결국, 사람은 모순과 인지부조화보다 불안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존재이다.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모순과 인지부조화를 견딜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설2.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본 것 뿐.

그리고 나는 그들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난 후에 ‘오늘은 여호와의 절기이다’라고 한 말에 주목한다. 이 말인즉슨, 송아지를 새로운 신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을 송아지 형태로 표현(?!)한 것 뿐이다. 이집트의 신들은 매나 독수리, 개나 야수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의 모습으로 송아지를 선택한 것 뿐이다. 여호와의 대리자라는 의미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기에 대해 배교에 대한 가책을 느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현현에 대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을 때도 ‘저 인간 또 왜 저렇게 뿔이 나서 지랄을 할까’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이지, ‘우리가 너무 엄청난 짓을 저질렀어. 큰일났다.’의 반성 모드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십계명으로 우상 숭배를 금지하신 때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로, 백성들은 우상숭배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상 숭배에 대해서 큰 문제 의식은 없었을 수도 있다는 거다.


가설3. 그냥 놀고 싶었을 뿐

그냥 시어미 같은 잔소리를 퍼붓는 모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진탕 놀아보고 싶어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They celebrated with feasting and drinking, and they indulged in pagan revelry. - 그들은 먹고 마시며서 이교도의 환락에 빠졌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히브리인들은 고질적으로 우상숭배의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다. 이것은 고대 근동 지역의 종교관, 제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바알과 아세라 등 가나안 종교의 제의에는 여사제와의 매춘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도 좋은 것이었다. 신앙심이 깊을수록 성행위를 많이 할 수 있다니. 오늘의 사건도 어쩌면 종교 행위를 핑계삼아 방종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설4. 모세를 제끼려는 시도

연결해서 백성들이 아론을 앞세워 체제를 전복시키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집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모세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지만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런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는 표현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그러고보면 모세에 있어서 이 장면은 굉장한 위기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고라의 자손들이 이 시점부터 모세의 지도력에 불신을 보이며 백성들을 선동했다면 결과는 또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질문2. 레위인들의 살육에도 아론이 살아남은 이유는?

‘히브리인들은 왜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을까?’ 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답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이유건 모두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이번 질문은 좀 대답하기가 궁색해진다. 바로 ‘우상 숭배에 대한 레위인들의 살육에도 아론이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가설1. 위협적인 상황에 대한 정상참작

우리 형법 제22조(긴급피난)에는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라고 되어있다. 아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하게 위협해서 어쩔 수 없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라면 무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죽음을 앞두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핑계대기 미안한 소리이긴 하지만 -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협이 닥치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론이 아닌, 누구에게라도 순교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백성들이 위협해서 어쩔 수 없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면 아론에게도 동정이 가지 않은가. 자신도 말하거니와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그랬다고. 핑계처럼 보이지만, 백성들의 집단적 폭압은 현실적인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 개인으로서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에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다.


가설 2. 친위 쿠데타에 협조한 대가

금송아지를 숭배했다고 레위인을 시켜 3,000명을 학살한 사건을 두고 처음에는 모세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이걸 정치 드라마로 각색해 보면 느낌이 좀 달라진다.

당시 모세의 권위는 출애굽 과정에서 보여준 기적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모세라는 지도자의 종교적 카리스마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지도자가 군중을 광야로 끌고 나와서는 40일을 짱박혀 있다고 보면 백성들 입장에서도 멘붕이 오지 않았을까.

오지 않는 지도자를 ‘죽은 셈’치고 아론을 명분으로 하여 새로운 신을 만든 것은 사실 -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 시도라고 볼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모세는 이런 움직임을 간파하고 ‘우리 (여호와의) 편 모여~!’라고 조직을 규합해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닐까.

예전에는, 무방비인 백성을 상대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생각했었다. 또, 눈치껏 보고 빨리 그 편으로 줄을 서면 살 수 있는데, 멀뚱히 서 있다가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현재 ‘황금 송아지파(?)’의 세력이 커져 있다. 모세 입장에서는 초동 진압을 해야 하는 것이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눈치를 보고 줄을 서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레위인에게 내려진 명령은 ‘무차별 살상’이라기 보다 ‘황금 송아지파’를 진압하는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 세력을 축출하는데 아론이 핵심 멤버의 리스트 등 모종의 정보를 제공하며 전격적으로 전향하지 않았을까.

또 하나, 아론의 제사장의 지위나 지도자의 형이라는 인맥 앞에서 레위인들의 칼이 주저했을 수도 있다. "종교적 권위가 가진 면책특권"과 심판의 칼날조차 피해가는 권력의 속성으로 설명한다면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시니컬한 해석일까.


가설3.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한 번의 관용’

아론은 단순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모세와 함께 사역한 초기 지도자이다. 애굽에서 모세의 대변인이 되어 바로 앞에 섰고(출 4:14~16), 열 가지 재앙을 수행하는 데 함께 참여했으며(출 7:1~2), 출애굽 직후에는 하나님이 직접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겠다”고 하셨다(출 28:1). 그러니 하나님이 그가 저지른 실수에도 불구하고 “일회성 관용” 혹은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일 수 있다.

성경에서 공로가 인정되어 처벌이나 죽음이 유보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예컨대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내가 주 앞에 진실하고 전심으로 행하였음을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신 것과 같은 사건 말이다. (왕하 20:3).

하지만 동시에, 공로가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성경은 철저히 “공로보다 은혜”를 강조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도 결국 실수 한 번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민20장), 다윗도 밧세바 사건 이후 큰 징계를 받는다. 즉, 공로가 있다고 해도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계나 경고가 따를 수 밖에 없다.

아론도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불에 즉사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의 황금 송아지 사건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그의 실수를 잊지 않았다. 즉, 용서는 되었지만 하나님은 잊지는 않으셨다는 것.


가설4. 하나님의 직접 용서와 모세의 중재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를 알게 된 하나님은 “저 백성은 완고하고 반항적이다”고 탄식하시며 모세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저 놈들은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처럼 타오르던 그때 모세는 아론과 백성의 죄를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각오’로 하나님께 중재한다.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시려거든 원컨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주옵소서.” 신명기 9:20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그 때에 나(모세)가 또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아론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도 그를 멸하시려 했다. 그러나 모세의 중보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살아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모세가 가진 영적 능력으로 하나님과 타협을 하거나 그의 권한으로 아론을 사면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과 협상을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크세르크세스 앞에 함부로 나섰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에스더의 결단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아론을 구할 수 있었다. 아론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공로도 참작이 되었겠지만, 그를 구한 것은 모세의 중보였다.

공평하지 않다고? 맞다. 너무도 불공평한 일이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다. 차별하시는 분이다. 어떤 이는 우상을 만들어 노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비명횡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직접 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내세웠는데도 살아남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한 불공평함을 다른 쪽에서는 ‘은혜’라고 부르지 않는가.


살아남은 자의 책임

결국 아론은 살아남았다. 모세의 중재 덕분이든, 정치적 거래 덕분이든.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3,000명이 죽어나갔다. 이후의 아론의 삶을 생각해 보면 - 대제사장이 되어 제단에 송아지의 피를 뿌릴 때마다, 아론은 황금 송아지 앞에서 춤추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 자신은 살아남은 은혜를 누렸지만,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의 무게를 지고 송아지를 들고 제단 앞에 서야 했다. 살아남은 것은 축복이 아니라, 평생 그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형벌이었을 수도 있다.

황금 송아지 사건은 고대 이스라엘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끊임없이 불안을 잠재울 '눈에 보이는 신'을 찾는다. 내가 불안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만든 금송아지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위기가 닥치면 아론처럼 비겁하게 변명하거나, 군중 속에 숨어 요행을 바란다. 아론이 살아남은 이유를 따지기 전에 자문해 본다. 만약 오늘 모세가 '여호와의 편에 설 자는 누구냐'고 외친다면, 나는 과연 황금 송아지를 버리고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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