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졸필이다. 예쁜 일기장을 받아도,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페이지를 찢고 또 찢는다. 삐뚤빼뚤한 글씨, 서툰 문장, 형편없는 말투가 싫어 한 장씩 뜯다 보면 어느새 반 이상을 버린다. 결국 남은 건 시작도 끝도 없이 표지만 덩그러니 남은 공책이다. 그래서 어느 해의 일기는 아예 시작도 못 했고, 또 어떤 해의 일기는 중간에 흐지부지 멈춰 있다.
그에 비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싸구려 공책인데 애착이 가는 일기장이 있다. 펜자국에 눌려 두툼해진 종이, 잉크 번짐과 지워낸 흔적, 바랜 색깔 속에 고스란히 고민의 시간이 담겨 있다. 어설펐지만, 꾸역꾸역 써 내려간 그 시간들이 고풍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끄러운 기록이면서도, 어쩐지 그것들이야말로 ‘내가 살아낸 증거’ 같아 훈장처럼 느껴진다.
인생도 그렇다. 잘못 쓴 페이지가 수두룩하다. 한때는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리고 싶고, 뜯어내고 싶은 실수와 과오가 있다.
하지만 인생은 공책이 아니다. 지나간 페이지를 들춰볼 수는 있어도, 찢어버릴 수는 없다. 흘러간 하루는 주워 담을 수 없고, 잃어버린 기회는 불가역적이다. 마치, ‘기혼(旣婚)’이라는 말 속엔 ‘이미 결혼해버린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삶에는 그렇게 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이 있다.
어제의 결정이 오늘을 만든다. 어제의 말 한마디가 지금의 관계를 바꾼다. 그걸 알지만, 누구에게나 잘못 쓴 페이지는 있다. 우리 모두 완벽하지 않다.
그렇다면, 후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는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핑계로 덮지 않고, 쿨하게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둘째는 다시 후회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施爲宜似千鈞之弩(시위의사천균지노) - 일을 할 때는 천근짜리 활을 당기는 것처럼 하라." 인생의 발걸음은 사소해 보여도 신중해야 한다. 한 마디, 한 걸음이 방향을 바꾼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신중함으로 살아야 한다.
셋째는,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회에 발목 잡혀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긴긴밤』이라는 동화엔 이런 말이 있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많이 후회한 코끼리가 내일은 더 좋은 코끼리가 될 수 있어.”
죄책감은 사람을 짓누르지만, 동시에 우리를 더 겸손하고 깊은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는 모두 잘못 쓴 페이지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럼에도, 한 권의 일기장을 끝까지 써 내려가는 것.
그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