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다. 나는 취향이 생긴 이후 시작한 연애에선 줄곧 문신이 있는 사람만 만나왔는데, 주로 팔뚝 어딘가에 무언가를 새긴 이들이었다. 함께 잠을 자는 이의 몸뚱이에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으면 어색할 지경이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친구들은 나를 걱정했다.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보라는 조언 같지 않은 조언도 여럿 들었다. 그럼에도 맨몸은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추잡한 나의 취향이 꽤 우스웠다. 문신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는 방증인가. 몇 번째 바뀐 건지 모를 나체를 눈 앞에 두고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래서 내 연애는 늘 실패로 끝이 났나, 저 빌어먹을 그림 때문에. 혀로 그 그림을 핥아내리면서 그런 의문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취향이 무척이나 확고한 사람이라 상대의 몸에 새겨진 문신 범위를 자꾸만 넓혀갔다. 팔뚝에서 허벅지, 허벅지에서 배, 배에서 목 끝까지. 그렇게 범위가 넓어질수록 나는 안심했다. 그림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덜 숨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신은 고백처럼 몸에 남는 것이고, 한 번 새기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격보다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말은 바뀌어도 살은 남는다. 나는 그 남아 있음에 자꾸만 기대를 걸었다.
문신을 채 완성하지 못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상반신을 옭아매는 선들은 온통 공허했다. 작업 도중 몸살이 나 시기를 놓쳐버린 뒤 방치했다는 그의 말에 나는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찮다는 말을 자주 했다. 제 몸뚱아리 하나 완성하지 못하는 그의 허술함에 기가 찼다. 그 빈 곳을 달뜬 숨으로 채우길 여러 밤이었다. 내가 그 빈 그림 위에서 춤을 추는 일은 허다했지만, 그 그림이 내 위에서 피스톤질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비어버린 문신처럼 가벼운 이였다.
남겨진 문신에 대한 믿음은 번번이 배신 당했다. 그림은 남았지만 사람은 떠났다. 남겨진 것은 흐릿해진 잉크와 그 위를 지나간 시간뿐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문신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신을 믿음처럼 사용해왔다는 사실을.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라는 말은, 어쩌면 맨몸을 견뎌보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문신 대신 흉터를 본다. 지워진 자리, 덧그려진 흔적, 애써 감춘 공백 같은 것들. 누군가의 몸에서 그림이 사라져도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취향이 아니라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문신은 좋다. 다만 그것이 사랑의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부끄러우니까 아무도 읽지 않을 긴 글로 남긴다. 또한 취향에 맞지 않게 나는 어떤 문신도 갖고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나 취향 따위가 아니라 일탈에 관한 동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어린 시절의 동경이 그저 귀여워질 만큼 시간이 흐르길 바랄 뿐이다. 나도 이젠 결혼 아니면 실버타운 둘 중에 하난 결정해야 하는 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