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

by 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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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하게 연애하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사귄 날짜를 세고 커플링을 나눠 끼며 기념일을 챙기고 의미 없는 질투를 하며 미친듯이 싸우고 민망하게 화해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유치하게 굴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했는데, 막상 사랑 앞에 서면 몸이 먼저 굳었다. 사귄 지 며칠째인지 세어보던 손가락도, 커플링을 맞추러 가자던 말투도, 질투 섞인 장난을 얹던 표정도 전부 어린 날의 나에게나 가능했던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사랑을 다시 하고 싶었지만, 이미 다 커버린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감정의 무게를 예전처럼 가볍게 들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사랑은 늘 나를 조금씩 움츠러들게 했다. 사소한 투정조차 과한 짐처럼 느껴지는 어른의 연애 속에서 나는 끝내 아이처럼 굴지 못한 채 작아지기만 했다.


어쩌면 정말 유치했던 건, 그런 마음을 숨기고 괜찮은 척했던 나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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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좋아하고 일부러 사랑하며

조금씩 자신을 소모해 가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나는 당신에게 기울어지는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지 못했다. 조심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아니었고 아끼는 척했지만 이미 다 건네고 있었다. 애써 담담한 얼굴로 서 있으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는 매번 당신 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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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눈꼬리를 서리듯 휘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스쳤다. 어디에서였을까, 오래전에 잠깐 머물렀던 공간처럼 어렴풋한 향. 우리는 함께 담배를 피웠고, 정신을 돌렸을 때 나는 그의 숨결에 섞여 번지는 연기를 천천히 들이마시고 있었다.


긴 밤 동안 남자는 거듭 괜찮은지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달뜬 숨만 내뱉기 일쑤였다. 몇 번의 절정 끝에서 남자는 자꾸만 좋아한다는 말로부터 도망치려 했으나 나는 함부로 남자에게 좋다는 말을 했다.


한 번 해보자는 남자의 결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좋다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후회 없는 실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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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후회 없는 실수로 다행스러운 최악이 되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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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곧 죽을 여자랑 자게 된 소감이 어때요?


그녀의 목소리는 농도가 너무 높은 술처럼 혀끝에 걸렸다. 말끝마다 끈적한 울림이 달라붙어 방 안의 공기까지 천천히 묽게 오염시키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 틀어 나를 바라봤다. 움직일 때마다 시트가 축축하게 구겨졌다. 눅눅한 숨결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ㅡ당신이 너무 살아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녀는 느리게 웃었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면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내 손자국을 스치듯 드러냈다. 붉고 오래된 자국 위로 그녀의 숨결이 얇게 떨렸다.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턱선을 가볍게 긁었다. 이어서 목 아래로 천천히 내려왔다. 닿는 곳마다 열이 묻어나서 마치 그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체온을 조금씩 나에게 옮겨놓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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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자꾸만 내 가슴께나 골반 언저리와 같은 약점을 파고들며 사랑한다고 말할 것을 강요했다. 터뜨리듯 사랑한다고 말하니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나를 안았다.


나는 종종 남자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물었고, 남자는 그때마다 매일 보고 싶은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매일 보고 싶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하는 꼴이 얄미워져 팔뚝을 한 대 세게 쳤다. 그는 나를 번쩍 안아들 수도 있었음에도 내가 때리는 모든 손길을 두려워하고 아파하는 척했다.


퇴근길, 제일 먼저 남자에게 퇴근 보고 메시지를 보내면서 문득 나도 매일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꾸 사랑한다고 말을 하니 어느새 정말 사랑하게 된 것일까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나는 또 남자의 팔뚝을 내려칠 요량으로 그를 불러냈다. 내려친 건 주먹이 아니라 입술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이미 세뇌 당한 사랑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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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는 말을 요즘처럼 자주 들은 적이 없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내가 예뻐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면 늘 보정을 덕지덕지 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예쁘다는 말은 어쩐지 나를 조롱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끝없이 나를 깎아내린다.


누군가가 나를 예쁘다고 말해줄 때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내심 그 말에 매달린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으니 타인의 언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 그게 나의 잔존한 온기이자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자존감이란 건 결국 타인의 언어에 기생하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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