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를 만날 때면 나는 늘 유치해졌다. 별것 아닌 일로 집에 간다며 떼를 썼다가도 오빠가 해주는 가벼운 키스 한 번에 배시시 웃곤 했다. 오빠는 내가 꼭 아기 같다며 그렇게 불렀는데 나는 그 애칭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음에도 그것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면 오빠도 꼭 ‘나도 사랑해’라고 답해야 했고, 오빠가 내게 서운한 말을 할 때면 나도 꼭 그런 말들로 상처를 주려고 애썼다. 우리 관계를 계산한 건 언제나 나뿐이었다.
나는 종종 오빠를 '야'나 '너' 같은 호칭으로 아무렇게나 불렀다. 오빠는 그것을 늘 지적하며 오빠라고 부를 것을 종용했다. 나는 그게 좋아서 더 아무렇게나 불러댔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있어 그게 흔해빠진 호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빠라는 말은 나만이 그에게 쓸 수 있는 애칭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꼭 그런 것에 집착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우리만 아는 것, 그 한정된 세계를 나타내는 보조사 ‘만’에 목을 매달았다.
오빠는 종종 내 이야기를 듣는 척했다. 오빠는 피곤하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피곤함은 늘 나와 있을 때 찾아왔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고,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내 말이 그에게 닿지 않을수록 나는 더 큰 소리로 사랑을 증명하려 들었다. 그러면 그는 키스하라고 하거나 내 팔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그 짧은 순간마다 나는 다시 안심했다. 그렇게 조금씩 불안이 나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오빠를 만나기 전까지의 내 관계들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서로를 좋아한다 말하면서도 우리는 진심보다 역할을 주고받았다. 마음을 나누기보다 ‘연인’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였을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 알맹이를 채우고 싶었다. 진짜 마음이 닿는 관계, 겉모습이 아닌 속으로 단단히 묶인 관계를. 하지만 그 마음은 어느새 증명이 되어버렸고 나는 사랑을 느끼기보다 사랑을 확인받는 데에만 서툴게 몰두했다.
나는 오빠와의 관계에 온 마음을 쏟았다. 사랑이 단단해질수록 그 속이 채워질 거라 믿었다. 그래서 더 많은 말을 했고, 더 많은 표정을 지었고, 더 많은 감정을 내보였다. 하지만 나의 모든 시도는 결국 관계를 조금씩 닳게 했다. 알맹이를 채우려다 오히려 껍질만 남겼다. 나는 비어 있던 관계가 두려워서 차라리 소모되는 사랑이라도 좋다고 믿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 사랑이라는 말을 붙잡아두면 그 안에 마음도 남아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남은 건 형태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 관계를 완전히 비워내지 못한다. 어쩌면 아직도 언젠가 그 알맹이가 다시 차오를 수 있을 거라 터무니없이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