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받지 못한 존재

by 서립

그 사람을 피해 다닌 지 한 달. 그동안 병원을 지겹도록 다녔다. 소독이다 검진이다 해서 갈 일이 많았다. 생명을 죽인 대가라 생각하고 꾹 참고 견뎠다. 그 좋아하는 술도 먹지 못했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 괜찮았다. 생각도 나지 않았으니까. 생을 마감해야 하는 때가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웃겼다. 수술한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본 건 전 애인이었다. 바람난 여자의 낙태 수술 뒷바라지를 하는 이 남자가 우스워 죽을 것 같았다. 사랑은 우스운 거구나. 남들이 보기에 이해하고 알 수 없는 것. 그게 사랑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회식이 생겨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마주해야 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나는 또 잔뜩 젖고 취해 있었고 담배도 마음껏 피워대느라 기분이 좋았다. 그래, 사람은 이런 걸 하고 살아야지. 거지 같은 섹스가 아니라. 내가 술을 먹다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그 사람이 어느새 옆에 서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와이셔츠 단추가 답답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잡아 뜯고 싶었다. 그게 꼭 이미지 메이킹이 잘 된 그 사람의 사회생활 같아서 괘씸했다.


"몸은 좀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 대단하고 거대한 일을 나 혼자 결정하고 견뎌냈다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서 괜찮냐는 질문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아서 해결하는 호구 같아요?"


수술 당일부터 지금까지 내내 들었던 생각을 물어보고야 말았다. 그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했다고 했다. 아무것도 못 했기에, 해결할 수 없어서 나서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이미 수술을 결정하고 해버린 후에 통보한 탓이었다. 가정을 정리할 생각이었어요. 그 남자는 또 내가 우스워질 말을 했다. 쉽게 뱉어버릴 수 있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또다시 들뜨고 기대하고 내일을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그게 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목이 메었다. 나는 내일이 오는 게 너무도 힘겨운 사람인데 이 사람은 그걸 너무 쉽게 할 수 있게 한다. 내가, 언제부터 이랬지?


이미 없어진 목숨. 환영받지 못한 존재. 사라져 버린 뱃속의 존재와 내가 뭐가 다른지에 대해 생각하며 담배 한 개비를 더 입에 물었다. 그래도 대화할 수 있어서 좋네요. 그 사람은 말했다. 전 죽을 것 같아요. 내가 대꾸했다. 그 사람을 마주하는 것도 힘들었다. 살인자라고 욕하는 환청이 계속해서 들렸다. 환청이지만 사실이었으므로 더 괴로웠다. 어둠이 어깨를 잔뜩 짓눌렀다. 나는 차츰 작아졌다. 이러다 땅 속으로 꺼질 것 같았다.


회식이 끝나고 데려다주겠다는 그 사람의 제안을 거절하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도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그리로 가겠다고 하니 얼른 오라고 환대했다. 내가 갔을 땐 영이 혼자 술잔을 입 속으로 털어놓고 있었다. 내가 혼자 술을 먹고 있었냐고 묻자, 다른 사람들은 다 돌려보냈다고 답했다. 왜? 내가 묻자, 너 다른 사람 있는 거 불편해하잖아. 툭 내뱉듯 영이 대답했다.


"우리 결혼할까?"


영이 반쯤 감긴 눈으로 물었다. 내가 조소했다. 영이 삿대질을 하며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어떻게 결혼을 해. 내가 조금은 화가 나서 말하자 영은 왜 못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게 넌 그렇게 어렵냐?"


영이 덧붙였다. 그렇다고 네가 사랑인 건 아냐. 내가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소주를 입에 털어넣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사랑이면 되겠네. 영이 시뻘게진 얼굴로 말했다. 난 누구 사랑 못해. 소주가 유독 써서 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영이 왜냐고 또 물었다.


"나 애 지웠어."


내가 생각하기에 중절수술이 조현병보다 나은 무언가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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