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타로점을 봐
신월 아래를 지혜와 직관, 조언으로 비추다
조심스레 끈을 풀고 펼치는 스프레드 천, 카드 뭉치를 올리고 셔플을 시작하면 경쾌하게 공간을 울리는 서걱거리는 종이의 마찰 소리, 카드를 펼치는 순간부터 오로지 직감에 의존 하게 되는 몇 번의 선택이 따른다. 카드를 뒤집으면 한 장 한 장 담긴 의미에 달뜨는 마음. 선택의 조각들이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 떠오르는 영감이 이어진다.
인생은 어떻게든 순환의 굴레에서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간다. 내가 가진 바람 중의 하나는 '타인 앞에서 말하고 싶다' 는 것이었다. 방송기자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여전히 말과 무대에 대한 갈망이 컸으므로 단순한 일상의 대화가 아니라 '주목도가 있는 말'을 하고 싶다는 의미었다. 결과적으로는 말로 이 상황과 시간을 이끌어가고 싶다는 내면의 의식이 타로카드라는 취미로 나를 이끈 것 같다. 타로 리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하루하루 스펀지처럼 단편적인 뜻을 흡수해 완성된 이야기로 다시 뱉어내는 과정에 푹 빠져 있다.
기자를 그만 두게 된 건 길지 않은 내 인생에 크나큰 변곡점이었다. 평생의 꿈이자 완성의 단계라 생각했던 일을 벗어나게 된 순간 내 앞에는 텅 빈 평야에 0이라는 출발선이 놓여 있었다. 짙은 그믐달 아래 놓인 상태에서 유약해진 나에게 힘을 준 건 타로 카드였다. 동양철학과 사주명리가 인생의 주춧돌이자 대들보라면, 타로 카드는 비와 눈, 번개를 막아 주는 낱장의 기와였다. 무(無) 의 상태에서 새로운 사회적 삶을 설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 때, 그 안에서 삿된 마음이 들 때면 타로 카드가 조언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그 안에서 점쳐진 대로, 점쳐진 바가 내게 용기를 준 대로 좋게 흘러 지금까지 오게 됐다.
한 번 관심이 생긴 건 친한 친구의 표현대로 넝마가 될 때까지 물고 파고 늘어지는 성격 덕에 본격적으로 타로 리딩을 시작해보자 한 게 불과 한 달 전이다. 정확히는 정답지가 명확한 정통 유니버셜 타로 종류보다는 영감과 직관에 따르는 오라클 카드를 공부하고 있다. 각각의 오라클 덱마다 특화된 분야나 의미하는 바가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덱을 새로 들일 때마다 처음부터 공부해야 하는 학습의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만큼 쌓인 지식을 적용하여 더욱 더 풍성한 해석이 가능해질 때마다 오는 쾌감이 상당하기 때문에 이 중독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카드 리딩은 사실 예술과 비슷해서, 성향과 호오의 영역이라고 본다. 믿음이나 신앙 같은 거창한 종교적 굴레로 나아갈 것까진 아니다. 다만, 초행길을 걸을 때 이정표와 지도를 따르듯이 매 순간 처음 마주하거나 혹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의 장면들을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꾸밀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임은 분명한 것 같다. 카드를 리딩하며 지금의 내 곁에(또는 내담자 곁에) 존재하는 상황을 인지하고 기쁜 것은 더 환희롭게, 조심해야 할 것은 더 신중히 두드려 보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다채로운 카드를 해석해 이야기 한 편을 엮는 즐거움이 크다. 이 지구에 80억 개의 장르가 존재할 텐데,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서사에 감칠맛을 더해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이자 즐거운 취미인가. 말맛을 살려 누군가의 고민을 함께 느끼고 조언을 주는 과정에는 많은 에너지가 따르는 게 사실이지만 그만큼 작은 보람과 뿌듯함도 생겨난다. 넓게는 타로 리딩도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의 하나라서, 어쨌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과 말을 업으로 삼은 이상 내 스스로에 대한 수련도 된다고 생각한다.
즐거운 취미가 생긴 덕에 주변을 더 섬세히 살피고 소중하게 바라보려 한다. 카드 한 장의 의미들이 모여 중요한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듯이 내 주위에 존재하는 무수한 것들도 내 삶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곳에 있는 것일 테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운명을 따라 걷는 더딘 시간 속에서 오늘도 카드는 펼쳐지고, 자신감을 얻은 나의 발걸음은 더욱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