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렇지 않은 벽화마을을 만나다
통영 동피랑의 ‘성공’ 이래 전국 각지에 불어 닥쳤던 벽화마을 열풍은 어딜 가도 비슷비슷한 구성과 지역 주민과의 괴리로 어느덧 적잖게 사그라든 지 오래다. 하지만 그럼에도 2차원 이미지를 실제 공간과 엮어 보여주는 벽화의 독특한 매력은 제대로만 보여준다면 색다른 재미를 주게 마련이다. 강풀 만화거리는 벽화마을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새삼 일깨워주는 공간이다.
강동구에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된 연유
강풀은 만화 독자들만이 아니라 만화가들 사이에서도 ‘웹툰 시조새’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곤 한다. 물론 웹브라우저에서 스크롤을 내리는 방식으로 읽는 ‘최초의 웹툰’을 정의하자면 조금 더 앞으로 돌려야 한다. 하지만 2003년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를 시작한 강풀의 <순정만화>는 스크롤로 내려 읽는 장편 스토리 만화의 연재와 완성이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여 지금까지 웹툰의 본격적인 시작점으로 회자되고 있다.
<순정만화> 이래로 강풀의 만화는 잘 짜이고 몰입도가 높은 스토리텔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 <마녀> 등 강풀표 사랑 이야기인 ‘순정만화’ 시리즈를 비롯해 <아파트> <타이밍> <이웃사람> <어게인> <조명가게> 등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미심썰)’ 시리즈, <무빙> <브릿지>와 같은 ‘액션만화’ 시리즈 등 다양한 작품들을 꾸준히 그려 왔다. 작품을 거듭하면서 시간 능력자들의 이야기인 <타이밍>과 신체 능력자들의 이야기인 <무빙>의 주인공들이 한 작품 안에서 얽히는 강풀판 <어벤저스> 시리즈 <브릿지>처럼 작품 속에 구축된 세계관이 한층 더 크게 확장해 가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만화 만큼의 인기는 얻지 못했지만 2006년 <아파트>를 시작으로 <바보>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웃사람> <26년> 등이 영화로 제작되었고 <타이밍>은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강풀 만화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엔 단연 잘 짜인 스토리텔링의 힘을 들 수 있다. 한 시리즈의 호흡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이야기 구조와 완급 조절은 신작 웹툰이 수없이 명멸하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한 경쟁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밖에 또 다른 특징을 들자면 공간적인 면을 들 수 있다. 강풀 작가는 작가 본인이 두 살 이래 계속해서 살고 있는 서울 강동구의 풍경들을 꾸준히 본인의 만화 공간 속에 녹여내 왔다. 작가 본인이 지역에서 성장하고 신문 배달 등을 하며 젊은 시기를 보냈던 지역에 애착을 보여준 결과물이기도 하겠지만, 그 덕에 만화 속 배경 공간이 풍성해짐은 물론 이야기의 현실감을 높이는 장치로도 작용하고 있다.
오래도록 많은 만화 시리즈를 한 지역 공간을 무대로 삼아 발표해 온 유명 만화가가 여전히 그 지역에 계속해서 거주하고 있으며 새로운 만화도 여전히 그 지역 공간에서 발표하고 있다. 만화를 포함해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서도 이러한 사례는 찾아보기 드물다. 2013년 서울 강동구가 성내동 일대에 ‘강풀 만화거리’를 천호대로 168가길 일대 13만2376㎡ 규모로 조성한 건이렇게 창작물 안팎을 가로지르는 실제적 맥락에 기초한다.
강풀만화거리 돌아 보기
강풀 만화거리는 2013년 처음 성내2동 일대에 조성되었고 2014년 말 2차 조성을 거쳐 완성되었다. 강풀 작가의 작품 가운데 ‘순정만화 시리즈’ 네 작품들 - <순정만화> <바보> <당신의 모든 순간>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소재로 삼아 구성된 벽화마을의 그림들은 작중의 분위기를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들에 아기자기하게 반영해두고 있다. 강풀 작가는 이 거리 조성에 원 저작권자로서 작품 이용을 허락한 데 이어 본인 스스로도 젊은 시절 신문 배달을 하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따뜻한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결과물인지라 강풀 작가의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 시리즈보다는 당연하게(?) 순정만화 시리즈로 진행된 듯하지만, 그 덕에 상당히 밝고 포근한 인상을 품고 있는 인상이다.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실제로 벽화가 조성된 이래로 쓰레기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하니 어느 마을이 지닌 공공적 방향성이 마을의 분위기에 지속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강풀만화거리는 ‘천호대로 168가 길’을 중심축으로 성내2동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생활공간들 사이사이의 골목길을 오밀조밀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것이 특징이다. 2013년 처음 조성될 때 23번까지 붙은 벽화의 번호는 2014년 2차에 이르러 61번까지 늘어났다. 1차와 2차로 나누어 조성되면서 번호의 순서가 골목길의 순서대로가 아니라 약간 뒤죽박죽되긴 했지만, 중간에 여러 이유로 사라진 벽화나 공간들의 맥락도 충실히 기록해 안내하고 있는 점이 보기 좋았다.
일단 사전정보가 별달리 없이 갔다가는 어디에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강동역 4번 출구에서 나온 후 파크랜드 강동역점이 나올 때까지 약 140m 가량을 걸으면 ‘성안마을 강풀만화거리“라 적힌 기둥이 나온다. 재밌게도 이 기둥은 파크랜드 강동역점이 기증한 것이다. 표식을 보고 왼쪽으로 꺾으면 천호대로 164길이다. 들어가기 전에 ”어서와“라 적혀 있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조형도 한 번 보고 들어오면 좋다.
‘강풀 만화거리’는 이름 그대로 강풀 만화의 캐릭터들이 골목길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는 공간이다. 붉은 벽돌이 주를 이루는 구옥들이 즐비한 옛 서울 골목 정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공간들에 여러 벽화와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림을 번호로 따라가면 다소 섞여 있다는 인상이지만 번호에 집착하지 말고 도로에 수놓인 별 모양 안내 표시를 따라 돌아다니다보면 여러 재미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마치 그 자리에 정말로 있을 법한 인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골목을 돌아다니는 잔재미를 준다. 전봇대마다 만화 속 대사들을 캘리그래피로 적어놓은 것도 재미다. 벽화를 그냥 던져놓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과의 연결점을 계속해서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좋지만, 역시 그냥 봐도 괜히 즐거워지는 소품들이다.
강풀 만화거리의 화룡점정은 바로 ‘승룡이네 집’이다. 작중 형태를 그대로 재현했다기보다는 문화 공간의 이름을 <바보>의 주인공 이름으로 지어놓은 것이다. ‘우리 동네 만화 카페’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승룡이네 집은 도서관이라기엔 조금 소박한 만화 독서 공간과 더불어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카페 공간, 그리고 만화가들에게 지원되는 작업 공간으로 나뉜다. 공간 안에는 만화학원 수강생들의 작품 전시를 비롯한 이런저런 볼거리들이 제공되고 있다.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잠시 숨을 돌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판에 박힌 벽화마을과 차별화를 꾀한 공간
벽화마을의 원조 격이라 할 만한 통영의 동피랑이 벽화마을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마을 정경과 어울려 정말 예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따라하면서 벽화 마을은 곧 몰개성의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젠 누구나 벽화 마을 하면 떠올릴 법한 벽화들이 몇 있다. 이를테면 날개라든가 말이다.
강풀 만화거리엔 날개가 없고 만화 캐릭터가 있다. 그것도 이 지역 공간에서 자라나 지금도 자기 이름을 건 만화를 끊임없이 그려내고 있는 만화가의 캐릭터들이다. 강풀 만화가 회자되면 회자될수록 이 공간의 캐릭터들은 계속해서 생명력을 뿜어낸다. 도봉구 쌍문동의 둘리 거리가 둘리라는 옛 메가 히트 캐릭터의 오랜 역사를 현재에 구현하며 세대 공감을 끌어낸다면, 강풀 만화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과 함께 하는 작가와 더불어 현재 진행형으로 캐릭터의 생명력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만화를 활용한 또 다른 사례를 완성해 내고 있다.
한데 강풀 만화 거리의 특징은 이뿐만이 아니다. 2차 조성까지 거치며 강풀 만화 거리는 꽃밭을 비롯해 조형물 속에 동네 아이들이 직접 등장한다든지, 가장 후미져 보이는 골목 공간을 작품 속 한 장면을 활용해 넓고 밝아 보이게 만든다든지 하는 공간 재해석을 통해 이곳이 그저 관광지가 아니라 실제로 주민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그 공간을 살기 좋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구성을 통해 관철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술 작가와 주민 그리고 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강풀 만화 거리 조성사업은 마을 재생이라는 차원에서도 상당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일부 업소들은 만화 장면이나 강풀 만화 단행본들을 직접 인테리어에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 강풀 만화 거리도 단지 이 거리 자체에만 사람들을 모으고 마는 게 아니라 주변의 시장 등으로도 가보라고 안내문과 조형물을 통해 끊임없이 권유(?)하고 있다. 주민 및 주변 상권과 공존하지 않으면 테마 거리는 반드시 퇴색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모습이다.
또 한 가지는 기록이다. 양산된 벽화 마을(또는 벽화를 채용한 지자체 등)이 벽화를 맥락성을 지닌 작품이라기보다는 유행 따라 치장한 장식품으로 내어놓은 경우가 많은데, 강풀 만화 거리의 벽화들은 하나하나를 작품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단순히 유명 캐릭터들을 벽화로 옮겨놓은 데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작품의 어떤 내용이었는지, 이 장면을 어떤 미술가가 어떤 재료로 벽화에 심었는지를 벽화마다 소상히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듯하면서도 이러한 지점 하나하나가 찾는 이들로 하여금 다양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면 벽화 해설을 신청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매월 첫째주, 셋째주 토요일과 단체방문객을 위한 상시투어가 있고 사전신청(02-3425-6136, 강동구 도시디자인과)한 방문객에게는 평일에도 해설을 제공한다.
강풀 만화거리, <백종원의 골목식당> 배경지가 되다
강풀 만화거리가 최근 미디어에 다시 오르내린 건 강풀 작가의 신작 때문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외식업체 사업가 백종원 씨가 주인공인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성내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소 문제가 있던 음식점들이 백종원 씨의 솔루션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매력인 프로그램인데, 2018년 10월 10일부터 방영한 회차에 강풀 만화거리의 식당 몇 곳이 참여했다. 덕분에 강풀 만화거리가 새삼 다시 한 번 시청자들에게 알려지는 계기도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만화거리를 찾은 사람들이 찾을 만한 명소들이 몇 곳 더 생긴 셈이 됐다.
짬뽕집 <THE 짬뽕>을 비롯해 국수집 <김여사네 국수>, 백종원의 칭찬을 받은 한식풍 파스타집 <피콜로> 등이 있는데 점심 무렵이어선지 사람들이 제법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내가 이곳 거리를 찾은 날은 마침 다소 흐린 날씨였던지라 “흐린 날엔 얼큰한 면이지”라며 짬뽕집에 들렀는데 찾는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방송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인상 깊었다. 다른 식당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기왕 덧붙은 관심이 강풀 작가의 만화와 만화 거리로도 이어져 거리의 생명력이 더 배가되기를 희망해 본다.
■ 강풀 ‘순정만화’ 시리즈
강풀 표 웹툰의 대표 격인브랜드인 <순정만화>는 2003년 발표한 <순정만화>를 시작으로 시즌 2 <바보>, 시즌 3 <그대를 사랑합니다>, 시즌 4 <당신의 모든 순간>으로 이어진다.
순정만화 시리즈는 30살 회사원 남성과 고교생 여성의 사랑을 다룬 <순정만화>부터 어린 시절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뇌손상을 입은 승룡이와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던 지호의 인연을 그리는 <바보>, 인생 막바지를 향하는 노인들에게 찾아온 새로운 인연을 따스하게 그린 <그대를 사랑합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 사람들이 죄 좀비로 변한 세상에서 각자의 집에 고립된 남녀가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당신의 모든 순간> 등 다채로운 소재와 무대 위에서 사랑과 인간다움에 관한 물음을 꾸준히 던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강풀만화거리는 이 순정만화 시리즈 네 작품을 주 소재로 다루고 있다. 2013년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되던 당시 순정만화 시리즈의 다섯 번째 시즌인 <마녀>가 공개되었는데, 강풀 작가는 <마녀>의 배경을 강풀 만화 거리가 준비되고 있던 성내동 골목으로 잡았다고 한다.